비정규직, 고용 불안에 대한 기사가 뜰 때마다 클릭해본다. 나도 모르게 비교하고 있다. 나보다 열악한지 나은지 확인하고 있다. 위안받거나 허탈해진다. 못된 습성이다 싶으면서도 마우스 휠은 바쁘게 돌아간다. 생존 본능에 가까운 확인 작업이다.
초년생 시절엔 비정규직을 취재하는 게 고달팠다. 나, 나도 좀 봐달라고. 내가 월급 150 받고 일하는데 누가 누굴 취재하냐고. 입술 꽉 깨물고 모든 장면 속에 들어간 '나'를 빼냈다. 이건 내가 해야 하는 일이야. 감정이입은 하되 내가 나락으로 떨어지진 말자.
익숙해졌다 싶을 때쯤 대한민국 30대 평균 연봉 기사를 클릭하는 나를 발견했다. 30대 중반에겐 과장 초년생이란 별칭이 따라붙는 세상이었다. 내게 과장이란 적어도 이 직장에선 영원히 달 수 없는 호칭이었다. 또다시 위로했다. 난 괜찮아. 나만의 살 길을 찾았으니까.
이 회사에 들어온 지 햇수로 7년. 초기에 작가들에겐 visitor라는 글자가 새겨진 출입증이 발급됐다. 작가 한 명이 회의시간에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우리가 취재를 가면 "당신 신분은 뭐길래 방문자 출입증을 달고 있어요?" 물어온다는 것이었다. 그는 매우 조심스럽게 단어를 골랐지만, 목소리는 몹시 떨렸다. 쌓아온 울분이었다. 이야기를 듣던 나는 마치 난 그런 걸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듯 태연하게 경청했다. 속으론 바라고 있었다. 선배가 해결해주기를. 이야기를 다 들은 선배는 대수롭지 않단 듯 대답했다. "뭘 그런 걸 신경 써.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시간이 흐르고 새로운 출입증이 발급됐다. 영문 이름과 증명사진 제출을 부탁해왔다. 행정팀 문자에 그토록 심장이 콩닥거릴 수 있을까. 일주일 뒤 반짝거리는 플라스틱 출입증을 받았다. 사진 위엔 '프리랜서 작가'라는 활자가 굳건히 새겨져 있었다. 그래도 좋았다. 하지만 프리랜서라는 사실을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닐 낯짝이 내겐 없었다. 고민하던 내 눈에 작은 스티커가 들어왔다. 휴가로 태국여행 갔을 때 트렁크에 붙어있던 수화물 스티커였다. 프리랜서 작가라 적힌 활자 위로 방콕행 수화물표가 붙었다. 이게 여기 왜 붙어있어? 보는 사람마다 물어왔다. 대충 둘러댔다. "휴가 생각하면 일할 맛이 나잖아."
보도국에 작가가 있다는 건 내부에서도 외부에서도 달가운 일이 아니었던 것 같다. 인턴도 VJ도 CG팀도 영상취재도. 저마다 할 일을 수행한 뒤엔 바이라인이라는 꼬리표가 달린다. 영상 맨 끝에 나가는 이름자막이다. 후배 이름이 먼저 나갔네, 내 이름을 빼먹었네. 현장에서보다 치열하게 매의 눈으로 확인한다. 바이라인의 세상은 그랬다. 그들이 사투를 벌이는 그 세상 속에 작가는 없었다. 나는 할 말은 해야 하는 성격이었기에 작가도 바이라인을 달아달라 요청했다. 선배로부터 대답이 돌아왔다. "이름 나가는 거? 초년생일 때는 그게 중요하지. 결과물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는 뜻이야. 안 나가는 게 좋은 거야. 아직 자기가 초년생이라 몰라서 그래."
차라리 책임을 질 테니 나가게 해 달라 말하고 싶었다. 그게 아니라면 좀 더 이해할 수 있는 명분을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무책임한 작가가 되라는 말인가요. 묻고 싶었지만 끝내 말할 수 없었다. 문제나 일으키는 작가가 되고 싶진 않았다.
비정규직이나 프리랜서의 고충을 풀어놓은 기사엔 늘 같은 댓글이 달려있다.
그러면 너네도 공부해서 정규직 돼
왜 날로 먹으려고 하나 ㅉㅉ
회사는 물론이거늘 세상이 프리랜서를 바라보는 시선에 맞설 자신이 내겐 없었다. 그건 마치 프랑스혁명 때 빵을 달라 외치는 시민들에게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않아요? 되묻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대답처럼 들렸다. 못생겼어? 다시 태어나. 월급 올려줘? 성과를 보여줘. 힘들어? 원래 그런 거야.
그렇게 조금씩 사회와 타협해가는 사이, 회사에서 프리랜서 작가가 누려야 마땅할 것들이 사라져 갔다. 개국 시절부터 직접 받아왔던 제보를 외부인은 접근할 수 없는 사이트로 만들어버린다던가. 그 외부인에 내가 속해있다는 사실은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건 원칙이니까. 용납하기 힘들었던 건 그 원칙이 일할 때 방해가 된다는 사실이었다. 몇 번 건의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았다. "원칙이 그래서요. 어쩔 수 없어요." 나는 어쩔 수 없는 걸 바꿔보자고 목소리를 내는 사람인데, 정작 내 문제에 목소리를 낼 힘은 없었다.
작가의 고료를 10만 원 올려달라 했던 피디는 14년 일했던 직장에서 하루아침에 해고를 당했다. 청주방송 이재학 PD 이야기다. 나는 그의 이야기가 수면 위로 올랐을 때부터 눈을 감았다. 귀는 닫았다. 방송작가들이 노조를 만들자며 서명운동을 받으러 다닐 땐 흘려들었다. 마주하기 싫었다.
이재학 PD의 동생은 형이 프리랜서였다는 걸 형을 보내고 나서야 알았다며 고백했다. 나 역시 "방송작가는 다 프리랜서야?"라는 질문을 못 들은 척 지나갔던 적이 몇 번 있다.
그런 나날을 지나 오늘이 왔다. 며칠 전에 출입증을 잃어버렸다. 임시 발급증엔 방문자(VSITOR)가 대문짝만 하게 쓰여있었다. 사내 원칙 상 사원증은 목에 걸고 다녀야 하는데, 나는 곧 죽어도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시큐리티 직원은 내가 지나갈 때마다 "출입증 패용해주세요" 신신당부를 해왔다. 나는 다시 7년 전으로 돌아가있었다. 구질구질함이 싫었다. 오늘만큼은 떨쳐내고 싶어서 출근길 버스 안에서부터 목에 걸어봤다. 웬 걸, 해보니 별 거 아니다. 이렇게 조금씩 프리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