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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민 Jun 17. 2020

"나 진짜 아니야. 너는 알잖아?"

전화가 걸려왔다. 오랜만에 보는 이름이었다.

나는 수년 전 그를 처음 봤다. 현장에서였다. 그는 난생처음 현장이란 곳에 나가 어버버 하던 나에게 이것저것 조언을 해왔다. 별 거 아니라는 듯, 익숙하다는 듯, 내가 모르는 모든 것에 대답해줄 수 있다는 듯.


얼핏 꼰대 같으면서도 정감이 가는 인상이었다. 그는 초짜인 나를 보듬어주었다. 시간이 지나고 일에 익숙해지면서 어느새 나는 그의 앞에서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있었다. 말투는 공손했지만, 처음 만났던 그때완 달리 나의 태도도 이만치 자라 있었다. 때론 그의 거친 화법에 성을 내기도 했고, 그가 해오는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건성으로 대답하기도 했다. 그리고 한동안 우리 사이에 교류는 없었다. 마주칠 일이 없었고, 딱히 연락을 건넬 사이도 아니었다. 그래도 아주 가끔 안부를 물었고 어쩌다 마주치면 반갑게 인사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초짜였던 내가 그날의 현장을 6년 만에 다시 찾았던 어느 날, 그에게 연락했다. 오랜만에 가니 생각이 났다고. 그는 작고 사소한 나의 안부인사에 기뻐했다. 연락해주어 고맙다고 두고두고 말해왔다.


몇 개월쯤 지났을까 어느 술자리에서 그가 해고됐다는 소문을 들었다. 현장에서 시비가 붙었고, 시비를 공론화시키기 싫었던 사측은 시비를 잠재우기 위해 그를 내쳤다고 했다. 그날 그는 술에 취해 난동을 부렸다고 했다. 그는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럴 수도 있겠지, 지레짐작을 해보았다. 오래 성실하게 다녀도 문제를 일으키면 단칼에 해고를 당하는구나. 무서운 세상이다. 안타깝다. 내 생각은 거기까지 미쳤다. 그러나 그에게 안부를 묻기 위해 휴대폰을 꺼내들진 않았다.


그런 그가 전화를 걸어온 것이었다. 수화기 너머 들리는 목소리는 살짝 술에 젖어있었다. 개명한 지 5년이 다 되어가는데 아직도 옛 이름을 불러오는 그를 보며 우리가 참도 연락을 안 한 사이라는 걸 실감했다. 잘 지내시냐 물으니 대뜸 되묻는다.


"너도 들었니?"


대답할 세도 없이 그는 말을 이어갔다.


"나 아니야. 그거... 나 진짜 아니야."


아닐 수가 있나. 아닐 수도 있는 건가. 그렇다한들 지금 내게 전화를 걸어와서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은 걸까.


"묻지도 않고 해고라고 하길래 나도 아무 소리 안 하고 그냥 알겠다고 나가겠다고 했어. 그런데 나 정말 아니거든. 잘못한 게 없어. 현장에서 시비 붙은 사람들이 악의를 갖고 있었어. 근데 위에서 바로 나를 자르라고 했다더라. 내가 아무리 결백해도 회사를 상대로 뭘 하겠니. 고소를 한다한들 나한테 뭐가 남겠니. 할 수 있는 게 없었어. 그래서 아무 말 안 하고 그냥 나왔어. 내가 회사 10년을 넘게 다녔는데 어떻게 함부로 행동할 수 있겠니. 내가 왜 아무 말 없이 그냥 알겠다고 나왔는지 알아?"


몰랐다.


"아무도 내 편이 없더라. 아무도 나를 믿어주지 않더라. 근데 너는 나 알잖아. 나 오래 봤잖아. 내가 거칠긴 해도 막 행동하진 않잖아. 시비가 붙은 애가 아들뻘이야. 우리 아들보다도 어려. 근데 내가 뭘 어떻게 하겠니. 아들 같은 놈한테."


듣고 보니 그렇긴 하다. 아무리 술에 취해 난동을 부려도 회사에 누가 될만한 일은 안 했던 그다. 그저 풍문 한 마디에 휘청, 그의 한 마디에 휘청. 너무도 가볍게 귀가 팔랑거리며 쉽게 수긍하는 나 스스로를 보며 내가 과연 이 사람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 자문해본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그에게 믿는다, 고 대답했다.


"믿는다고?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야. 사실이야. 나 안 그랬어. 그냥 그 말이 하고 싶었어. 한 사람은 알아줄 것 같아서. 너는 나를 알잖아."


내가 아는 그가 어느 선까지인지 나는 모른다. 그날 현장에서 나는 그를 보지 않았다. 그러니 더욱 모른다. 하지만 그의 믿기로 했다. 훗날 그의 이야기를 처음 들었던 것처럼 술자리에서 또다시 그의 이야기가 나온다면 그땐 아닐 거라고 말해야겠다, 다짐했다. 그런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다. 그래도 믿기로 했다. 믿는다는 건 어쩌면 사실과는 별개의 차원일 수도 있다. 믿는다는 건 그런 거다.


십여 분간의 통화를 마치고 또다시 십여분의 시간이 흘렀을 때 그로부터 카톡이 왔다.


'고맙다. 그래도 전화 안 받을 수도 있는 건데... 고맙다.'


이건 술에 취해 난동을 부려 한 기업으로부터 해고당한 남성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음에도 오해로 둘러싼 탓에 일자리를 잃은 억울한 이의 이야기가 아니다. 수없이 마주치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이, 나의 얄팍한 시선이 오늘따라 얄미워 적어버린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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