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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민 Jun 18. 2020

아무 말 대잔치

1. 불만은 완벽하게 그 일을 해낸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권리라고 느껴진다. 구조적인 열악함이나 불평등함, 부조리함은 사실 누구에게나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크기가, 이유가, 규모가, 피해 정도는 다르겠지만. 끝까지 누군가의 탓을 하며 명분을 찾아내는 사람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를 만들어내는 사람은 결이 다르다.


2. 엠씨몽의 개인사를 떠올리면 그에 대한 이미지가 부정적으로 먼저 다가온다. 그럼에도 난 그의 노래를 즐겨 듣는다. 그에겐 다른 가수의 피처링을 본인의 음색과 가사에 절묘하게 녹여내는 능력이 있다. 엠씨몽과 송가인의 조화를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난 엠씨몽 노래를 통해 송가인 가락을 처음 접했다. 고등학교 때 처음 듣기 시작해 30대 중반인 지금까지도 내 플레이리스트에 존재한다. 이 정도면 꽤 장수하는 편 아닌가. 배우 이병헌도 내겐 마찬가지다. 사생활과 온갖 찌라시를 떠올리면 '역시 연예계란...'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그럼에도 그가 나온 영화는 두 번도 본다. 뭐든 잘하고 봐야 하나 보다.


3. 낡은 운동화를 신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 처음 본 그날과 똑같은 모습이다. 한껏 뽐내고 나와도 예전에 한 번쯤은 본 적 있는 차림새다. 필통은 동생이 쓰다 버린 것을, 노트는 동생이 적다 내팽게친 것을 들고 다닌다. 신발과 옷차림, 가방, 브랜드. 그 모든 건 한 사람의 매력을 결코 담아내지 못한다. 정작 본인은 모를 거다. 때 묻고 헐거워진 낡은 필통이 본인이 얼마나 멋진 사람인지 보여주고 있는지. 몰라서 더 좋다.


4. 강원도에서 먹었던 총알 오징어가 맛있었다. 간판에 작은 글씨로 '전국 택배'가 적혀있는 걸 본 나는 그 자리에서 16마리를 주문했다. 도착한 택배 상자를 열어보니 내가 먹었던 그것과는 크기가 많이 다르다. 가족들에게도 맛보게 해 주려고 주문했는데, 부실한 모양새에 속이 상한다. 마릿수를 세어보니 주문한 것보다 많았다. 크기가 작은 만큼 더 넣어준 모양인데, 크고 실해서 주문한 내 마음엔 영 부족해 보인다. '제가 주문한 거랑 크기가 너무 다르네요'라는 문자를 기어이 보냈다. 그날그날 크기가 다를 수 있다며 괜찮으시면 다시 보내드릴까요? 묻는 사장님 문자에 마음이 불편해진다. 마릿수랑 크기는 내가 확인하고 오면 되는 것이기도 했다.


5. 저번 책모임에서 연애관에 대한 화두가 나왔다. 이성의 어떤 모습에 심쿵하냐는 질문이었다. 나는 땀 흘리는 모습이라고 했다. 대답하면서도 부끄러웠다. 무언가에 열중해서 땀 흘리는 모습이 좋다, 요는 요령 안 부리고 묵묵하게 일하는 모습이었다. 생각보다 많은 여성들이 공감해주었다. 자기 일 잘하는 모습에 반한단다. 난 잘하는 걸 말한 게 아니었는데. 잘하면 금상첨화지만, 못해도 괜찮다. 눈치 안 보고 제 역할에 최선을 다 하는 사람이 좋다. 생각해보니 아빠가 그런 사람이었다.


6. 나에겐 요정과 같은 존재가 있다. 지인이라고 하기엔 드라이하고, 측근이라고 말하기엔 아직 한 번 만난 게 전부인 사람. 한 번 만났지만 오래 알아온 것 같은 사람. 서로의 존재를 안 지 꽤 됐다. 만난 건 최근이다. 그분이 나를 처음 보고 건넨 말은 "예쁘네"였다. 예쁘다는 말을 들었을 때 가장 기쁜 건 그 상대가 남성일 때가 아니다. 중년 여성일 때다. 난 아직도 엄마가 예쁘다고 해줄 때 그날의 일진이 좋다고 믿는 사람이다. 여자 어른이 보는 나의 모습이 가장 궁금하고 신경 쓰이나 보다. 그리고 오늘 오랜만에 연락을 주셨다. 요정처럼 짠 하고 갑자기. 짧지만 정이 깃든 대화를 나눴다. 또 만날 수 있을까? 보고 싶다.


7. 퇴근하고 버스에 앉아 오늘 하루를 떠올려본다. 즐거웠다. 사무실에 앉아있는 시간이 즐겁다는 건 누리기 힘든 행복이다. 저임금 고행복. 뭐 이 정도면 살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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