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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민 Jun 16. 2020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는 쉬워

바람피우는 걸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맞는 말이지만. 온라인 강연섭외를 수락하고 오늘로 세 번째 일정을 마쳤다.


강연 첫날, 스튜디오에 도착하기 한 시간 전부터 손에 식은땀이 났다. 아무리 연습해도 목이 탔다. 일찍 퇴근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 사들고 거리로 나왔다. 준비한 멘트를 머릿속으로 그려가며 중얼중얼 외웠다. 에어팟을 꼽고 있지 않았다면 감히 용기 내지 못할 행동이다. 어쨌거나 연습은 필요했고 통화버튼도 눌리지 않은 휴대폰 화면을 쳐다보며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가끔 허공에 대고 (리액션을 요구하는 듯한) 웃는 표정으로 말할 때 왠지 모를 희열마저 느꼈다. 마스크가 신의 한 수였다.


연습을 해도 완벽함이란 없었다. 강연 시작하기 10분 전부터 화장실에 가고 싶어 졌다. 분명 방금 전에 다녀왔는데 말이다. 잘 보이려고 하지 말자. 나도 모르게 신경 쓰는 화면 속 내 얼굴에 마음을 주지 말자. 머리가 헝클어졌는지 표정이 이상한지 의식하지 말자. 거울 보며 심호흡하고 스튜디오에 들어갔다.


가장 패닉이 왔던 건 두 번째 강연이었다. 예상외였다. 한 번 해봤기에 더 이상 손에 식은땀은 안 났는데 말이다. 강연을 앞두고 혼자 연습하던 중 자꾸 말을 버벅거리는 나를 발견한다. 같은 이야기를 반복한다는 것에 새삼스러운 이질감을 느낀 거다. 방송국은, 특히나 보도국에선 기시감이 장애물이다. 같은 걸 보도해도 다르게 보여야 한다. 그런 면에선 구성의 힘은 크다. 그럼에도 제아무리 구성을 다르게 한다한들 똑같이 보는 사람 눈엔 똑같다. 기시감에서 도망치기 위해선 그 이상으로 공부해야 한다.


강연은 달랐다. 처음 이 이야기를 생각했을 때는 분명 재밌었는데. 이 이야기를 꼭 전달해야겠다는 마음이 간절했는데. 나의 뇌는 "이미 한 얘기잖아"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제야 강의를 한다는 건 말을 업으로 삼는 강사란 대단한 일을 하고 있구나, 느낀다. 수십 번 수백 번 반복해도 마치 오늘이 처음인 것처럼 행동한다는 건 연기가 아니다. 연기인 줄 알았지만, 그 순간에 집중한다는 뜻이었다. 두 번째 강연이 끝났을 때 주최 측 관계자분이 말을 건네 왔다. "몇 번 더 하시면 방송인 되시겠어요." 아하하, 웃으며 받아쳤지만 그게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중간에 말이 몇 번 막혔었다. 아무나 한다는 아무말 대잔치를 내가 하고 나왔다. 두 번째 강연을 들은 대학생들한테서 유독 날카로운 질문을 많이 받았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도 아무말 대잔치를 늘어놨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마음이 무거웠다. 수고한 날 나에게 주는 그 흔한 캔맥주 하나 사 먹을 기분이 아니었다. 그리고 오늘 세 번째 강연을 하고 왔다.


온라인 강연이다 보니 학생들이 듣는지 안 듣는지 졸린지 자리에 없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작게 띄운 댓글창으로 반응을 알아볼 뿐이다. 강연을 할 때마다 모두를 만족시키겠다는 생각은 버린다. 단 한 명, 한 명에게만 전달하자. 그 한 명만 들어줘도 감사하다.


그리고 처음과 두 번째와는 다르게 긴장 없이 마쳤다. 댓글이 올라온다. 어떤 경로인지 모르겠으나 평소 나의 블로그를 봐온 구독자라고 했다. 또 한 명이 등장한다. 블로그에 쓰여있던 글에 대한 질문이다.


세상에. 아무 생각 없이 끄적거렸던 블로그를 읽는 사람이 있었다니. 그걸 읽은 사람이 내 강연을 듣다니. 그리고 용기 내어 질문을 던지다니. 희미하고 가늘어 끊길 것만 같았던 가능성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인연이 된다. 옆자리에 앉은 사회자분이 얼굴이 벌게졌다며 놀린다. 감동했다. 감동했지만 감동이 끝은 아니었다.


책임감을 느낀다. 내가 뱉는 말에 대해, 내가 가지고 사는 생각에 대해. 고맙고 미안해진다. 강연을 신청해준 친구들에게. 과연 그들의 한 시간을 점유해도 될 만큼 나는 괜찮은 삶을 살았을까. 매순간 충실하게 걸어왔던 게 맞을까.


여러모로 기억에 남을 시간이었다. 내 나이가 어느덧 30대 중반이다. 어딜 가나 모범을 보이고 이끌어야 하는 나이가 됐다. 좀 더 좋은 어른이 되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그러니 오늘 적은 저 제목은 틀린 말이다. 처음이 어렵고 두번째는 더 어려워야 한다. 익숙해진다는 건 어쩌면 안주하는 걸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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