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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란과 현미 Jun 26. 2020

세상에 나만 나쁜 놈

할머니 댁에 가서 점심 먹기로 약속했다. 열두 시쯤 찾아뵌다고 했다. '다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을게' 하시길래 열한 시 반쯤 가야지, 했는데 결국 열두 시 정각에 도착했다. 도착하기 3분 전부터 카톡이 왔었다. 언제 오니, 민재(사촌동생)도 온단다.


'딩동'

안에서 할머니 목소리가 들린다. "OO이니?"

맞다고 대답하자 까르르까르르 웃는 소리. 할머니는 소녀다. 코로나를 핑계로 좀처럼 찾아뵙지 못했다. 바깥을 싸돌아다니는 내가 어떻게 할머니 댁에 갈 수 있겠냐, 는 이유였지만.


뒤늦게 온 사촌동생이 고기가 먹고 싶다며 입을 삐쭉삐쭉 거리니 할머니는 안절부절못한다. 그러게. 안 그래도 너희 아빠(삼촌)랑 나는 상추쌈만 해도 잘 먹는데, 민재가 온다 해서 고기를 사둘까 했었거든. 내가 사오겠다했다. 이 쉐끼 스물네 살 먹은 군대도 갔다 온 놈이 그냥 해주시면 감사하다 먹을 것이지, 꿀밤 한 대 먹이려다 말았다. 할머니와 삼촌 앞에서 무뚝뚝하던 사촌동생 놈은 현관문을 나서자마자 쪼르르 내 뒤를 따라온다. 누나, 어쩐 일이야? 어떻게 왔어? 누나 나는 어제 야간 근무해서 너무 졸려. 어제 친구가 우리 집에 와서 같이 술 마셨어. 친구가 고민이 있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그럼 또 그게 귀여워서 맞장구쳐주고 있다.


벌집삼겹살이랑 부챗살을 사 왔다. 사촌동생은 돼지고기를 더 좋아한다. 할머니는 굳이 당신이 구워주시겠다며 부엌 한편에 자리를 잡고 후라이팬을 달군다. 할머니의 오랜 우표수집책을 구경하는 내 주위로 삼촌과 사촌동생이 빙 둘러섰다. 저 멀리서 보셨는가 할머니는 들으란 듯이 큰소리로 말한다.

"아이고야, 느그들 오니까 좋네. 이렇게 밥도 같이 먹고. 오늘 참 행복한 날이다."


쌈채와 찬을 안방 테이블에 옮긴다. 할머니는 여전히 서서 고기를 굽는다. 내가 굽겠다고 했으나 한사코 거절한다. 당신이 구워야 맛있단다. 먼저 먹고 있으란다. 삼촌이랑 사촌동생 놈은 이미 자리에 앉았다. 나까지 앉아버리면 저 둘이 젓가락 들고 식사를 시작할 것 같아 부엌을 서성거리니 할머니는 어서 가 먹으라며 재촉한다.


밥솥을 열고 주걱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십자 모양을 그리더니 성호를 긋는다. 분명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해오셨을 습관인데 처음 알았다. 기나긴 세월 무심했던 거다. 소복하게 퍼낸 밥그릇을 나르고 모두가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고기를 담았던 접시가 반쯤 비워질 무렵 할머니는 고기가 모자라다며 다시 부엌에 향한다. 아랑곳 않는 삼촌과 사촌동생 놈, 부엌 한켠에 서있는 할머니 사이에서 난 마음이 불편해진다. 좋다고 먹는 두 남정네가 얄밉기도 하다.


고기를 사 오고 굽고 하면서 내게 허락됐던 시간이 흘렀고 결국 뒤늦게 식사를 시작한 할머니를 뒤로하고 먼저 나와야 했다. 눈 딱 감고 회사를 늦게 들어갈까 생각도 해봤지만, 그럴 수 없는 날이었다. 할머니는 또 웃는다. 아야, 그래도 오늘은 행복하다. 할머니는 참 행복해. 이렇게 느그들이 와서 같이 밥 먹으니까 행복해.


할머니 방에서 가방을 주섬주섬 챙겨 나오는 나를 끌고 부엌에 가더니 그림 하나를 가리킨다.

"너 보고 싶은데 못 보니까 할머니가 널 그려서 여기 갖다 놨어."

뭐예요 할머니 하나도 안 닮았네 하고 웃고 있지만 울었다. 잠깐 안방으로 다시 들어오라 이끌려 들어가니 거울 옆에 달려있던 인형 뭉치를 꺼낸다. 너 줄려고 사놨지. 이쁘지. 가방에 달고 다니는 거야.


제대로 이야기도 못하고 식사도 안 끝낸 할머니를 두고 나온 게 못내 마음에 걸렸다.





할머니는 평생 자식 생각, 손주 생각.

오랜만에 가서 삼촌과 사촌동생에게 이것저것 트집만 잡는, 세상에 나만 나쁜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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