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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민 Jul 02. 2020

8년 전에 온 문자

커피숍에 들어갔다. 혼자였다.

"오늘은 어쩐 일로 이렇게 조용해요?"


인상 좋은 사장님 멋쩍게 웃는다.

"그러게요. 오늘은 한적하네요."


커피 한 잔 주문해놓고 자리에 앉았다. 뒤이어 문 열리는 소리가 나고, 젊은 여성 한 명이 들어온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아이스 허브차요, 하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십여분쯤 지났을까, 누군가 호기로운 목소리로 등장한다. 아까 그 여성분 앞에 앉는 듯했다. 책을 펼쳐놓고 읽는데, 귀는 저 뒤쪽 두 여성이 앉은 자리를 향한다.


나이가 좀 있는 듯한 중년 여성이 영어로 강원도에 여행 다녀온 이야기를 뱉어내고 있다. 한 문장씩 더듬거리는 그녀의 언어를 마주앉은 여성은 적당한 추임새까지 넣어가며 곧잘 들어주었다. 이따금씩 틀린 문법을 바로잡아준다. 그때마다 중년 여성이 환호했다.


"댓츠 롸잇! 맨날 틀리네요."


과외구나. 나에게도 저런 경험이 있다. 아주 잠깐 백수였던 시절, 생활비 좀 벌어보겠다고 일본어를 가르쳤다. 대부분은 직장인이었다. 종종 저들처럼 프리토킹을 원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기본적인 회화가 되면 문법을 가르쳐야할 필요가 없어 내게도 큰 낙이었다. 아르바이트할 때 겪었던 에피소드, 데이트할 때 써먹던 언어들, 술자리에서 자주 등장하는 생생한 표현까지. 시간가는줄 모르고 주거니 받거니 했다. 


가끔 카페에서 만나 멀쩡하게 한국어로 안부를 주고받다가

"자, 그럼 지금부터 일본어로만 10분 갑니다." 하고선 일어회화를 주고받는 식이었다.


별생각 없이 옆에서 커피를 마시던 이들은 갑자기 귀를 쫑긋하며 엿듣는 눈치였고, 어떤 이들은 대놓고 뚫어져라 쳐다봤다. 나는 일본 사람 코스프레나 하는 사람이 아님을 밝히기 위해 곧잘 "지금 쓰신 표현보다 이러이러한 표현이 더 자연스럽겠죠. 아마 비즈니스 하실 때도 유용할 거예요." 라며 '과외 중'임을 강렬하게 티내곤 하였다.


그럼에도 가장 기억에 남는 학생이 있다. 그는 첫 수업 때부터 문제가 많은 이였다. 약속한 카페에 갔는데, 눈은 시뻘게져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건들건들하게 일어서더니 한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악수를 건네 왔다. 절은 담배 냄새가 풍겼다. 과하게 어미를 올리는 그의 억양은 조폭이 등장하는 영화에서나 들을법한 말투였다. 


 "아, 선생님이세요? 오셨어요? 안녕하세요? 앉으시죠?"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전 날 과음을 했고 정신 차려보니 아침까지 술을 마시고 있었단다. 생각해보니 오늘이 과외 첫날인데, 약속을 깰 순 없고 술은 많이 마셨고, 잠은 못 잤단다. 다음에 보자고 할까 수십 번 고민하다 같이 마시던 친구놈까지 데려와 아이스커피를 열 잔째 마시고 있단다. "그래도 저 약속 안 깨고 왔어요, 선생님." 능글맞게 웃는다. 옆에서 듣고 있던 친구가 다그친다. 선생님, 이 새끼 실패한 인생이에요. 엮이지 마요.


내 팔자에 어디서 이런 사람을 만났을까 싶었다. 그래도 두 살이나 어린 나에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써가며 말끝마다 선생님, 안 그래요 선생님? 뭣 좀 드셔야죠 선생님? 깍듯하다. 그리고 매우 당돌하게도 "이번 수업은 한 걸로 칠 테니까요. 제가 죄송하고요. 내일모레 뵙죠." 통보를 해왔다.


돌아오는 길 전철 안에서 수십 번 고민했다. 이 수업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주변에선 다들 말렸다. 딱 보니까 양아치네. 조심해야 된다. 끼리끼리 어울리는 거다. 고민 끝에 결정을 내렸다. 기가 차다는 듯 뒤도 안 돌아보고 나오는 나를 따라와 덧붙인 그의 한 마디가 컸다.


"선생님, 저 원래 이 정도까지 양아치는 아니에요. 저 진짜 열심히 할 거예요. 진심입니다."


그 친구는 공부의 '공'자와 털끝만큼의 인연도 없는 사람이었다. 스스로를 '닭과 붕어보다도 못한 새끼'라며 자책했다. 1분 전에 알려준 단어를 다시 물어보면 전혀 다른 대답을 내놓는 친구였다. 신박했다. 그러나 앞날은 매우 캄캄했다.


원초적이고 무식한 방법을 택했다. 하루에 단어 20개씩 설명해주고 무조건 외워오라 했다. 용케 외워온다. 수업 횟수가 늘어날수록 깜지는 채워졌다. 볼펜을 다 써 문방구에서 새 볼펜을 사본 건 난생처음이라 했다. 하도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해오길래 잘했다, 장하다 했더니 깜지 채우는 속도가 배가 됐다. 그렇게 스프링노트가 두 권이 되어갈 때쯤 주 2회였던 수업을 3회로 늘리고 싶다고 했다. 그게 과외를 시작한 지 2년쯤 지났을 때 일이다.


'가나다'를 가르쳐주면 'ㄱ'를 써놓고 끙끙 앓던 그 친구가 어느 날부턴가 더듬더듬 문장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드라마를 찾아보고 노래를 번역해와 해석이 맞는지, 이런 단어는 왜 이렇게 조합할 수 있는 건지, 라는 원초적인 질문을 던져왔다. 이곳이 개천이고 이 사람이 용이구나, 하던 시절. 그 무렵엔 나도 슬슬 재미가 붙어 신명 나게 수업했다. 버겁겠지, 싶었지만 매번 무더기로 숙제를 내줬다. 그러던 어느 날 과외를 하루 앞두고 문자가 날아들었다.




문자를 받고 한동안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건 이 맛에 하는구나. 캡처까지 해놓고 SNS에 올려 감동의 도가니,라고 적었던 게 벌써 8년 전이다.


우연히 들어간 카페에서 두 여성의 대화를 엿들으며 나 역시 추억에 잠겨 있었다. 읽던 책 진도는 못 나갔지만, 오랜만에 행복했던 기억 하나 곱씹었다. 실패한 인생이 어디 있겠나. 그런 거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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