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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라는 것

by 알로

페이스북은 나보다 기억력이 좋다. 수년 전 써놨던 글을 꺼내 보여준다. 5년 전의 너야, 어때? 지금 좀 나아진 삶을 살고 있어? 조용히 자문하게 된다. 많이 달라져있으면 조금은 성장한 것 같다. 변한 게 없다면 여전히 젊게 사는 것 같아 뿌듯하다. 그렇다. 이러나저러나 절대긍정이다. 오늘 떠오른 기록은 2015년 여름휴가 때 방콕에서 썼던 글이었다.



2015년 7월 24일 방콕, 태국


아쉬워서 한참을 있는다.

브런치에 글 50개 저장해보겠다던 내 여행 목표는 둘째날 이미 불필요한 스트레스가 되어버려 중단.


대신 한 가지 기분좋은 게 있다면

그동안 내 껌딱지였던 '물질에 대한 소유욕'이 이번 여행을 통해 사라졌다는 것.

외로울 때마다 허한 마음을 채우려 뭔가를 사들이곤 했던 내 오랜 습관아, 안녕~


육교 위에서 아기를 잠재우던 젊은 엄마가 팔던 팔찌를 한 개 사긴 했다. 이 날, 이 다짐을 잊지 않기 위한 증표라 해두자.


만나는 사람마다 물어왔다. 왜 혼자 왔냐고.

'혼자 왔으니 너랑 말할 수 있지 않느냐'고 답하니 웃는다. 그렇게 정말 많은 이들과 웃음을 주고 받으며 마음을 밀착할 수 있었던 이번 여정. 앞으로 더욱 세상과 사람들과 밀착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주세요.



그때부터 나는 브런치를 하고 싶었나 보다. 아직 작가 신청도 안 했던 때라 일주일 휴가기간 동안 글 50개를 '저장'해놓겠단다. 과한 패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불과 여행 이튿날, 불필요한 스트레스라며 과감하게 포기해버린다. 물질에 대한 소유욕은 안타깝게도 저 여행을 마친 후로도 종종 찾아왔다. 쟁여두겠다며 화장품이나 옷들을 사곤 했으니까. 그래도 20대 때 비하면 물질을 소비하면서 공허한 마음을 채우려고 했던 습관은 많이 사라졌다.


2015년, 처음으로 혼자 여행을 떠났다. 유학생활과는 또 다른 두려움이 밀려왔다. 여행지가 한라산 백록담이었기 때문이다. 쉬고 싶을 때 '쉬자'는 사람도, 힘들 때 '힘내'라는 사람도 없었다. 그저 모든 걸 나와 또 다른 내가 결정해야 했다. 끝끝내 올라선 백록담엔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흘려온 땀으로 범벅이 된 몸은 순식간에 식었다. 덕분에 하산하면서 감기 기운을 업고 내려왔다. 몸이라도 데워야겠다 싶어 가까운 목욕탕을 찾아갔다. 이용료는 4000원. 호주머니를 꼼지락 거려보니 달랑 3000원 있다. 죄 없는 가방만 만지작거렸다. 사장님이 웃는다. 아가씨, 땀을 왜 이렇게 흘려. 1000원 깎아줄게. 그냥 들어가요.


개운하게 목욕을 마치고 나오니 게스트하우스 사장님한테 전화가 걸려온다. 첫 여행지가 백록담이란 고백을 듣고 불안해했던 그는 기어이 버스정류장까지 마중을 나와주었다. 조수석에 있던 검은 봉지를 건네 온다. 배고프죠? 이거라도 먹어요. 맛있는 동네 빵집에서 사 온 거야.


게스트하우스에서 일하던 언니는 성게국을 끓여준다. 다음날 아침, 생일을 맞이한 나에게 근사한 길을 소개해주겠다며 알려지지 않은 올레길을 데려간다. 떠오르는 해와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에서 우린 우도 막걸리에 문어라면 한 접시를 해치웠다. 혼자 하는 여행이란, 언제 어디서 어떤 경험을 할지 늘 설렐 권리가 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회사로 복귀하고 한 달쯤 지나 새로운 팀으로 옮겼다. 아침부터 밤까지 일했다. 한 달에 두 번 쉬었다. 그마저도 쉬는 내내 카톡이 울리던 시절이었다. 막내였던 내가 할 수 있는 건 여름휴가 비행기 티켓을 끊는 일뿐이었다. 방콕. 혼자 가는 첫 해외여행은 그렇게 홧김에 결정되었다.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갔다. 아무런 계획도 짜지 못한 채 출국날짜가 다가왔다. 정신 차려보니 나는 새빨간 트렁크 하나 달랑 들고 공항철도에 오르고 있었다. 다음 정거장이면 인천공항이다. 두려움이 몰려왔다. 제주도야 말이라도 통하지. 말도 안 통하는 나라에서 혼자 다니면 참 심심하겠다. 어떡하지. 근데 이제 와서 후회한들 어떡하지.


두려웠던 만큼 행복했달까. 길을 잃으면 거짓말처럼 오토바이를 탄 여행자가 눈앞에 나타났다. 정류장까지 태워준다. 기차를 놓쳤는데, 다른 역으로 가면 탈 수 있다며 안내해준다. 인터넷에도 나오지 않는 정보들이 사람을 통해 내게 흘러들어왔다. 일주일 동안 묵었던 게스트하우스 주인장은 고향에 찾아온 딸내미 돌보듯 나를 품어주었다. 우연히 만난 한국사람도, 지나가던 개도 모두가 나를 인도해준 여정이었다. 그 감격에 벅차오른 심정으로 썼던 글이었다.


요즘도 혼자 다니는 걸 좋아한다. 5년 전 두 여행이 성공적이었던 덕분이다. 혼자 밥 먹을 때 음식물 씹는 소리를 듣는다. 턱관절이 움직이며 만들어내는 소리에 내 몸이 살아있음을 느낀다. 건강하게 음식을 씹어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한다. 맛을 온전히 음미할 줄 알게 됐다. 누군가와 함께 있었다면 시선이 닿지 않았을 구석구석에 눈길을 주는 여유가 생겼다. 얘기하느라 바빠 쳐다볼 새 없었던 하늘을 실컷 본다. 멈추고 싶을 때 멈추고 걷고 싶을 때 원 없이 걷는다. 그렇게 혼자만의 시간을 충분히 채웠을 때 비로소 다음 날을 맞이할 수 있게 된다. 누군가와 함께 보내는 시간도 비로소 집중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요즘은 주기적으로 혼자만의 시간을 갖도록 노력하는 편이다.


혼자일 때 세상을 다 가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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