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 후 지인들과 간단히 맥주집에서 술자리를 가졌다. 병맥주를 따라 마시려고 작은 맥주잔을 가져왔다.
54살 미영 씨가 말한다.
오백 잔에 마셔. 그럼 진짜 맛있어. 빨리 가져와봐.
난 오백 잔에 마시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작은 잔에 따라서 시원한 채로 홀짝홀짝 마시는 걸 좋아한다.
머뭇거리는 내 표정을 읽은 54살 동훈 씨가 말한다.
그냥 내비둬. 그건 자기 취향인데, 왜 너가 바꾸려고 해. 승민 씨 그냥 마셔요.
54살 미영 씨가 말한다.
아니, 더 맛있게 먹는 법을 알려주려고 하는 거지. 안 해봤으면 해 볼래? 이런 거지. 근데 요즘 그렇다. 너네들을 만나면 이야기가 길어져. 우리 엄마가 잔소리하는 건 그렇게 싫었는데, 나는 너네 앞에서 말이 길어지는 거야. 스스로가 안타까워. 왜 이게 중요한지 구구절절 설명하다가 원래 무슨 이야기하려고 했는지 까먹어 (웃음).
54살 동갑내기들 웃는다.
맞아, 맞아.
65살 태진 씨가 받아친다.
그게 꼰대야. 알아서 하겠지. 우리 아들놈은 뭐라 그러는지 알아? 아까 뭐 사러 간다길래 야, 그거 어디 어디 가면 팔아, 하니까 아, 저도 알아요! 하고 나가더라니까.
54살 동훈 씨가 맞장구친다.
우리 딸도 그래. 내가 다큐멘터리를 좋아하거든. 집에서 티비 보면서 저건 저런 거야, 이러이러한 거야, 하잖아? 그러면 딸들이 엄청 싫어해. 집사람도 뭐라고 하더라고. 그만 좀 얘기하라고.
나는 궁금해진다.
아빠가 이야기해주면 좋은 거 아니에요? 저는 좋던데. 아직 어려서 그런가? 따님 몇 살이에요?
54살 동훈 씨가 대답한다.
스물여섯. 스물둘. 아들은 고3.
54살 진훈 씨가 끼어든다.
승민이는 아빠를 많이 사랑하는 거네.
54살 동훈 씨, 웃으며 버럭 한다.
뭐야, 그럼 우리 딸들은 나를 안 사랑하는 거야?
65살 태진 씨, 손사래 친다.
뭘 또 안 사랑하는 거야. 그럴 때도 있는 거지, 애들은 원래 그런 거지. 나는 우리 아들 딸 앞에서 찍소리도 못해. 집에 가잖아? 딸은 지 방에 들어가서 안 나오고, 아들놈은 술 먹고 새벽 한 두시에 들어와. 평소에 이야기를 못하고 사니까 그러는 거야.
26살 지훈 씨는 곰곰이 듣고 있다.
54살 진훈 씨가 묻는다.
지훈아, 너는 안 그러냐.
26살 지훈 씨 대답한다.
저는 그렇게 말하면 엄마한테 싸대기 맞죠.
일동, 웃는다.
회사와 가족을 제외하고 10년, 20년, 많게는 3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 연령대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좀처럼 많지 않다. 상사 앞에서처럼 긴장하지 않아도 되고, 가족들처럼 편하거나 모든 걸 알고 있지 않으니 다양한 이야기가 오간다. 5,60대 어른들은 2,30대인 우리에게 궁금한 게 많다. 그것들은 대부분 아들과 딸에게 미처 물어보지 못했던 것들이다. 새삼스럽거나 그런 대화를 아직 나눠본 적이 없거나 조금 더 솔직한 목소리가 궁금하거나. 우리가 입을 여는 순간 그들은 온 힘을 다해 경청한다. 난 그런 그들의 모습에서 엄마와 아빠를 본다.
나 역시 아, 저도 알아요! 하며 방문을 닫아버렸던 시절이 있다. 뒤에서 날 쳐다보는 걸 뻔히 알면서도 매몰차게 돌아섰던 적 또한 있다. 한순간이었지만 오랫동안 후회로 남는 기억이자 더 시간이 지나면 땅을 치고 후회할 순간들이다.
나이와 꼰대, 성별과 부모 자식. 한국사회에선 10년이 20년이 백 년이 지나도 모든 연령대의 화두가 아닐까. 내가 가진 언어로 저 네 단어를 풀어내기란 쉽지 않음을 절감한다. 그러던 와중에 며칠 전 읽었던 김이나 <보통의 언어들>에서 마음에 드는 구절을 찾아냈다.
나이 듦에는 분명 혐오감이 팽배한 것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 이는 농담 속에서도 심심치 않게 드러난다. '나이가 들수록 말은 적고 지갑을 열어야 된다'는 말만 봐도 이 문장에 담긴 폭력성을 짚을 구석이 한두 개가 아니지 않은가. '나잇값을 못하고 설친다'는 비난은 얼마나 많은 늦은 용기를 주저앉히던가. (비난이 마땅한 경우일지언정 그 원인은 그 '사람'에게 있지 '나이'에 있지 않다.) 나이 드는 것에 대한 공포감에서 비롯된 방어심리일 수도 있겠지만, 이런 잘못된 프레임이 나이에 씌워지지 않았으면 한다.
나는 이미 우리 사무실 인턴들에게 그 흔한 밥 먹자는 말도 건네기 쉽지 않다. 커피 마실래? 라는 말을 건넸을 때 아까 먹었다는 대답이 돌아오면 재차 묻지 않는다. 처음엔 그들에게 부담이 될까 봐 조심스러웠다. 생각해보니 나이와 상관없이 누구를 대할 때나 적당한 거리는 필요한 방법이었다. 인간관계에서 질척거림을 배제했을 때 얼마나 자유로워지는지 깨닫는 요즘이다. 내가 누군가를 '꼰대'라는 타이틀로 묶어버리는 순간 나 역시 그러한 프레임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할 거라는 것 또한 절감한다.
그러니 이젠 조금은 자유로워지고 싶다. 누군가를 '꼰대'라고 칭하며 그에 대한 험담으로 타인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싶지 않다. 지갑을 연다면 말을 할 권리는 충분히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누군가의 지갑을 열게 하고 싶지도 않다. 지나치게 같은 말을 반복한다면 조심스럽게 화제를 돌리겠다. 끊임없이 말을 많이 한다면 나한테도 말할 기회를 달라고 당당하게 치고 들어가겠다. 어느 한 가지의 선택이 정답인 것처럼 강요해오면 뭔가 이유가 있겠지, 그만큼 신중하란 뜻이겠지, 조금은 여유를 가지고 마음 속에 넣어둬봐야지. 회사에서는 조금 어려우려나? 모르겠다. 해보고 안 되면 말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