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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회사에 갈까? VS 무슨 일을 할까?

by 알로

제가 대학교 졸업반 때 스물셋, 넷, 다섯. 이때 진로 고민을 정말 많이 했어요. 그때 저한테 가장 중요한 단어는 딱 두 글자였어요. '취직'


내가 어떤 일을 할까, 라는 것보다 나는 어떤 회사에 들어갈까, 여기 들어가면 좀 없어 보이지 않나, 그런 생각들을 굉장히 많이 했어요. 결과적으로 내가 진짜 원하는 일이 뭘까를 고민하기보다 이 회사는 그래도 좀 유명하지, 항공사에 들어가서 통역으로 일을 하면 조금 멋있어 보이지, 그런 것들에 신경을 썼던 거예요.


맞아요, 그런 생각 많이 하죠. 저도 그렇게 의식을 많이 했어요. 항상 채용이 하반기 때 많잖아요. 그러면 취업이 되었다 안 되었다를 명절 때 이야기를 해야 되잖아요. 이 회사가 얼마 큼의 가치가 있는지에 대해서 설명해야 되고.


그렇게 되는 것 같아요. 삼성 들어갔어, 그러면 오- 이러잖아요. 무슨 일 하는지 묻지도 않고(웃음).


궁금해하지도 않죠(웃음). 어느 부서에 있는지 묻지도 않고.


그런 유혹에 빠지기가 쉬워요. 우리나라 사회적인 구조도 그렇고 그런 걸 아예 무시를 할 순 없겠지만 그게 또 전부가 아니라는 건 확실해요. 제가 회사 이름이나 보이는 모습에서 마음을 내려놓게 된 건 아버지 말씀이 컸어요. 보통 진로 결정 못하면 휴학하거나 졸업을 유예하잖아요. 저도 반 학기 정도만 늦추고 싶었어요. 졸업하고 공백이 생기면 취직할 때 안 좋으니까.


그래서 아버지한테 반년만 연장하겠습니다, 하니까 이유를 물어요. 다른 이유가 있다면야 얼마든지 늦추는 건 네 자유지만, 진로 결정을 못해서 늦추지는 말래요. 졸업하고 고민하라는 거예요. 아버지는 아셨던 거예요. 사람이 소속이 있으면 나태해지는 부분이 있잖아요. 저는 특히 더 그러거든요(웃음). 그래서 아버지 말씀대로 졸업을 해버렸어요. 그렇게 맨땅으로 떨어지니까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요. 아, 나는 혼자 여기서 뭐 하고 있지. 왜 나만 이렇게 뒤처진 거지. 아무것도 없이 덩그러니 혼자 떨어지니까 그때부터 열심히 고민하게 되는 거예요. 치열하게. 곡기를 끊고 사흘 밤낮을 진로 딱 이 두 글자 가지고 고민했던 적이 있었어요. 울기도 엄청 울고.


생각해보니까 저는 언어가 너무 좋아요. 옛날부터 비디오 틀어놓고 영어, 일본어 따라 하는 걸 좋아했단 말이죠. 발음 따라 하고 문장 만들고. 그럼 오케이. 일단 저는 언어, 외국어, 번역, 통역 이쪽으로 가면 되겠는 거예요. 그렇게 차근차근 단계를 밟고 결국은 대학원에 진학했어요. 진짜 제대로 공부를 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거든요. 지금 생각해보면 처절하게 내쳐진 시간이 있었기에 후회 없는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생각보다 남들 눈치 볼 필요 없고요. 네이밍에 이끌릴 필요도 없어요. 나, 나에게 온전히 집중할 시간이 필요해요.


요즘은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는 세상이잖아요. 브런치에 가입하면 작가라는 호칭이 붙어요.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래요. 작가가 되는 건 정말 쉬운데, 작가로 살아가는 건 힘들다고. 작가는 매일매일 글을 써야 한다, 써야 작가다, 라는 말을 하거든요. 다른 직업도 마찬가지겠지만, 그 직업을 가진 다음부터가 훨씬 중요한 것 같아요.


사실상 내가 어떤 타이틀을 가지는 건 지나고 보면 어렵지 않을 수도 있어요. 물론 고생한 만큼 축하받아야 마땅한 일이죠. 어떤 타이틀을 가지고 온전히 이 사회 구성원으로 홀로 섰을 때. 그때부터가 진정한 싸움이 시작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싸움이란 게 타인과의 싸움이 아니라 나와의 싸움인 거예요 결국은. 내가 자리에 안주를 하냐 안 하냐의 차이인데. 그런 면에서 저는 고민의 시작점이 좀 늦은 편이었어요. 여러분 나이 때 이런 고민을 했으면 좀 더 성장했을 텐데 저는 늦은 만큼 더 치열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어요.


얼마 전에 회사 동료랑 밥을 먹었어요. 평소 일을 굉장히 야무지게, 열심히 하는 사람이에요. 요즘 일은 어때요? 물어보니까 딱 다른 사람이 와도 저만큼 할 수 있을 정도로 해요, 하는 거예요. 무슨 말이냐 되물었어요. 이름이 김영희다, 하면 딱 김영희만이 할 수 있는 걸 해야 되는데, 누가 와도 김영희만큼은 할 수 있을 정도만 한다는 거예요. 슬럼픈 가봐요, 하면서 우울해했어요.


제 눈에는 그걸 인지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멋졌어요. 사람이 365일 홈런만 치고 살 순 없잖아요. 롱런할 거면 힘줄 때 주고, 뺄 땐 확 뺄 줄도 알아야 한다고 하잖아요. 내가 가진 색깔이 뭔지, 남들과 다른 점이 뭔지, 그런 강점들이 보도국 같은 데에선 중요해요. 방송도 마찬가지고요. 출발선은 다 같잖아요. 거기서 어떻게 나아가느냐가 불과 수년만 지나도 확 달라져요. 고민을 하냐 안 하냐의 차이도 클 수밖에 없다는 걸 주변 분들을 보면서 자주 느껴요.


한 방송이 만들어지기까지는 혼자, 개인사업자라고 생각을 하시면 돼요. 기자도 혼자 취재를 하는 거고 저도 마찬가지예요. 각자의 개성과 색깔이 하나로 모여질 때 이게 방송으로 나가는 거거든요. 방송은 절대 혼자서 만들 수 없어요. 지금도 이렇게 카메라가 있고 옆에서 도와주시는 분이 있는 것처럼요. 5분짜리 하나 나갈 때도 기자, 작가, 영상취재기자, VJ, 운전해주시는 차량 담당자, 오디오맨, 편집기사, 음악감독, 인턴기자, 데스킹 해주는 선배 기자, 자막팀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동원돼요.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저마다 역할은 다 달라요. 그거 누구나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하지만 한 사람이 지닌 에너지, 개성, 색깔, 능력, 마음가짐에 따라서 천차만별이에요. 큰 차이는 아주 사소한 디테일에서 시작되거든요.


아무랑이나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어요. 어떤 분명한 색깔이 있는 사람이랑 사람들은 일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자기만의 색깔을 찾는 건 굉장히 중요해요. 같이 일하는 분들 가운데 저 사람은 저런 색깔을 가졌구나, 하고 자극을 받았던 사람들이 있어요. 그분들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해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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