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인연을 살릴 줄 알아야 한다

by 알로

친한 동생이 고민을 털어놓는다.


언니 나 요즘 조금 많이 드는 생각인데

친했던 사람이랑 어쩌다가 꽤 멀어져요

어떤 사건이 있기도 하고,

그냥 자연스럽게 그러기도 하고


안 친한 사람이랑 소원해지면 신경도 안 쓰지만

친했던 사람이랑 그렇게 되니까

내가 문제인가 싶기도 하고

그런 생각이 좀 들더라고요


관계든 뭐든 유동적이라는 건

잘 알고 있지만

이런 생각이 쌓여가니까

생각이 깊어지네요


숱한 날 대인관계로 몇 날 며칠을 끙끙 앓고 지내던 나의 모습이 떠오른다. 동생이 맞닥뜨린 상황을 모두 다 알 순 없지만,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해본다. 나 역시 사람과의 관계가 중요하고, 예민하고, 마음을 많이 쓰는 성격이다. 누군가한테 미움받는 걸 견뎌내지 못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감정도 오래 담고 있을 성격또한 못 되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마음만 상했던 시간이 내게도 있었다. 동생의 속상함이 조용히 와 닿았다.


언제부턴가 조금씩 깨달았다.


노력을 해도 만들어지지 않는 관계가 있구나. 생각지도 못한 계기로 가까워질 수도 있구나. 내가 잘못하지 않아도 멀어질 수 있구나. 내 잘못에 개의치 않고 나를 보듬는 사람도 있구나. 이유 없이 내가 싫은 사람이 있는 것도, 이유 없이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너무나 당연하겠구나. 그렇다면 굳이 힘을 들일 필요가 없겠다.


'될 대로 돼라' 식으로 살아봤다. 확실히 가벼워졌다. 사람에게 큰 기대를 안 하게 됐다. 서운할 일이 줄었다. 약속을 파토내면 굳이 다시 잡으려 힘쓰지 않았다. 꺼려하는 것 같으면 거리를 뒀다.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 자리엔 마음 편하게 웃을 수 있는 사람들이 들어왔다. 그래서 그게 정답인 줄 알았다.


내 앞에서 방귀를 뿡뿡 뀌어대도 마냥 귀엽기만 한 동생들이 있다. 동생들과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갑작스럽게 정한 탓이었을까. 숙소는 누추했고 음식값은 바가지였다. 바닷물에 풍덩 빠졌고 서로를 빠뜨렸다. 피곤하고 힘들어도 복근이 당길 정도로 웃었다. 여행이니까. 뭐든 즐거운 거고 동생들도 그랬을 거라 확신했다. 나랑 코드가 잘 맞아서 그런 줄 알았다. 우리 셋은 성향이 비슷하고, 긍정적이고, 음식부터 노래까지. 모든 취향이 잘 맞아서 즐거운 거라 생각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불현듯 떠올랐다. 지난밤, 동생은 작지만 확실하게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낡고 허름한 숙소를 봤을 때 '남자 친구가 이런 곳을 데려왔으면 대판 싸울 감'이라는 둥. 바다에 빠뜨렸을 때 '사실 나는 물을 제일 싫어한다'는 둥. 새벽까지 잠 안 자고 수다를 떨었을 때 '언니는 체력이 대단하다'는 둥. 빵빵 터지는 웃음소리에 가려 들리지 않았을 뿐이었다. 동생들은 하나부터 열까지 내게 맞춰주면서도 본인들의 호불호를 분명하게 내색하고 있었다.


친하고 편하니까 이해하겠지, 우린 그런 사이니까. 그렇지? 말하지 않아도 알지? 으레 있는 일이지. 이 정도는 넘어가지, 가 아니라 더 아끼고 소중하게 여겼어야 했다. 관계라는 건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잘 맞는 사람? 그런 건 없었다. 깊고 귀한 관계엔 어느 한쪽의 배려가 깔려있고, 그 한결같음이 만들어낸 익숙함이었다. 동생들이 수년간 보내온 배려가 이제야 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진짜 바다에 뛰어드는 걸 좋아하는 줄 알았지. 술 마시고 싶다 노래를 부르길래 늦게까지 깨있고 싶은 줄 알았지. 낡고 허름한 숙소를 보더니 이런 게 기억에 남을 추억이지, 하길래 좋아하는 줄 알았지.


동생들에게 배운다. 사람을 아끼는 법. 사랑을 표현하는 법. 밤하늘을 오래 쳐다볼수록 별들은 더 또렷하고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자주 들여다보고 오래 들여다보는 법도 필요하다는 걸 배웠다.


고민을 털어놓은 동생에겐? 이렇다 할만한 위로를 건네주진 못했다. 그저 네 마음 편한 쪽이 최선의 선택이라 생각한다고 했다. 속마음을 털어놓는 행위는 썼다 지웠다를 반복한 수많은 순간들을 동반할 텐데 우리는 그 마음은 알아볼 줄 아는 사람이 되자고. 마음을 더 자주 표현하는 사람이 되자고. 오랜 밤 오랜 시간 동안 나란 사람을 보듬어준 동생들에게 건네고 싶은 말이었다.


유독 동생들 인복이 많은 편이라 느낀다. 좀 더 좋은 어른이 되어 든든하게 받쳐주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좋아하는 구절로 오늘의 마무리.


어리석은 사람은 인연을 만나도 몰라보고, 보통 사람은 인연인 줄 알면서도 놓치고, 현명한 사람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을 살려낸다.

-신희상의 시 [인연을 살릴 줄 알아야 한다] 中에서-

keyword
작가의 이전글어떤 회사에 갈까? VS 무슨 일을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