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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것들

by 알로

우리가 A를 만난 날, 40년 알고 지낸 후배가 지방에서 올라왔다고 했다. 후배가 겸사겸사 A를 만나러 온 자리는 우리에게 이미 2차였다. 후배는 흥이 오를 대로 오른 우리와 어울려야 했다. 내심 이 자리가 끝나면 A와 단둘이서 술자리를 가지고 싶은 눈치였다. 밤 10시. 3차를 시작하기에 이르진 않아도 마냥 늦지만도 않은 시간. 우리는 슬슬 집에 가야 할 시간임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시계를 본다든지, 주섬주섬 가방을 챙긴다든지. 그는 주변 눈치를 살피더니 형님, 한 잔 더 하러 가시죠, 실실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면 A는 우리가 다 듣고 있는 자리에서 말을 건넨다.


"아무개야, 나 만나러 여기까지 와줘서 고맙다. 정말 고맙다. 그리고 온 지 얼마 안 돼서 자리가 끝나버린 것 같아서 미안하다. 내가 마음 같아서는 너랑 한 잔 더 하고 싶은데, 시간도 그렇고 여기서 끝내야 할 것 같다. 다음에 또 보게 되면 그때 또 재밌게 마시자."


후배는 못내 아쉬워하면서도 집으로 향하는 A를 붙잡지 않는다. 후배를 보내고 우리와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던 A의 휴대폰이 울린다. 전화를 받아 든 A의 목소리는 한층 더 단호해진다. "미안하다, 내가 들어가 봐야 될 것 같네. 그래. 조심히 가고."


A가 전화를 끊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모님한테서 전화가 온다. "응. 나 이제 끝났지. 들어가." 그렇게 A는 귀가했다.


A는 65세. 고등학교 선생님으로 30년을 지냈다. 퇴직한 지 2년. A한테 수업을 받았던 학생들 (내 지인인 동생들) 말에 의하면 체육시간에 "야, 볼이나 차라" 축구공 던져준 채 운동장 한구석에서 데드리프트를 하고 있었던 '건드리지 못할 무서운 선생님'이었다고 한다. 의리, 상남자 같은 단어들이 어울리는 인상이라 했다. 180cm가 넘는 장신에 두 어깨가 딱 벌어진 거구. 젊은 시절 마포를 누비고 다니며 크고 작은 시비에 휘말렸던 사람이라 했다. 술 좋아하는 걸론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그런 사람이라 했다.


야, 승민아. 내가 예전 같으면 집사람한테 전화와도 그냥 안 받고 술 마시고 했거든. 집사람도 터치를 안 했어. 근데 얼마 전에 갑자기 그러는 거야. "당신은 나 같은 여자랑 만났으니까 복 받은 거야. 고마운 줄 알아." 근데 내가 그 말을 듣고 보니까 미안하더라고. 나이가 든 거지. 나도 잘해야겠구나, 싶더라.


먼 길 달려와준 후배에게 미안하니 자리를 지키고, 후배가 자의로 집에 돌아갈 때까지 곁을 지키고. 거절하는 게 미안해 말도 못 꺼내고, 다 같이 있는 자리에서 말하면 민망할까 봐 따로 말할 기회를 노렸을 거다. 나라면 그랬을 거다.


내가 생각한 선택지에서 A는 크게 벗어나 있었다. 그런 A가 새삼 멋져 보였달까. 되려 그 후배를 존중해준다는 느낌이 들었다. 같이 있던 우리도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감정의 절제가 결과적으로 상대방을 위한 길이 될 수 있다는 걸 그동안 나는 몰랐다.


드라마 '비밀의 숲'에서 2년 만에 재회한 조승우와 배두나. 주꾸미 볶음을 주문하고 요리가 등장하자마자 조승우는 회사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맥락상 거절할 수 있는 상사의 부름이었다. 배두나는 재빠르게 눈치채곤 손을 휘저으며 가도 괜찮다는 제스처를 내보인다. 조승우는 잠시 고민하며 눈치를 보다가 지금 곧 가겠다는 말을 상사에게 건넨다. 미안해하는 조승우를 보며 배두나는 활짝 웃는다. "이거 내가 다 먹어버릴 거야."


서로 다른 장면이지만, 비슷하게 느껴지는 건 감정의 절제가 주는 매력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아닌 상대를 위하는 마음. 상대의 불편할 마음도 헤아리는 시선.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자잘한 감정들을 평온하게 눌러놓은 채 상대를 보듬겠다는 의지. 나에겐 없는 점들이다. 요즘 들어 그런 면모를 보이는 사람들에게 마음이 간다. 절제미라고 해야 하나.


그나저나 반사판 조명빨 받고 백옥 같은 피부를 자랑하는 여배우들과는 달리 배두나는 눈가의 주름도, 볼록 나온 광대뼈와 깊게 파인 팔자주름도, 어딘가 모르게 세월의 흔적을 느끼게 해주는 자연스러움도. 그 어떤 것 하나 숨지 않고 화면에 그대로 노출된다. 역할이 역할인만큼 형사라는 프레임에 어울릴법한 내추럴함을 선택한 걸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배두나의 당당함이 느껴져서 좋다. 비비크림을 쫙 발라놓은 것처럼 매끈한 피부가 아닌 모공까지 보일 것 같은 조승우의 마스크도 좋다. 이러나저러나 그동안 몰랐던 것들에 매력을 느끼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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