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싶은 대로 보는 것
서핑하러 강릉에 몇 번 다녀왔던 지난해 여름. 바다를 배경으로 서프보드 들고 찍은 사진을 SNS에 올린 적이 있다. 몇 달 지나지 않아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서핑 잘하는 애'라는 인식이 생겼다.
"너 서핑 잘하잖아. 나도 가르쳐줘."
"내가 뭘 잘해. 이제 서너 번 갔구먼."
"에이, 또 겸손하네."
배드민턴으로 치면 난생처음 셔틀콕 만져보고 인증샷 찍었는데 다음날 일어나 보니 '배드민턴 엄청 잘 치는 애'가 돼버린 셈이다. 민망했다. 그 후론 서핑하러 갈 때마다 '한 번도 못 일어섰다'는 둥 '바다만 보다 왔다'는 둥 구구절절 초보자 코스프레를 자처했다. 소용없었다. 미국에 살고 있는 친구들까지 반응을 보여왔다.
"이제 엄청 잘 타겠다!"
"아니야, 나 진짜 영어 알파벳 외우는 수준이야."
"그래? 사진으로 봤을 땐 전문가 같아."
그 후로 서핑 사진을 올리는 건 자제했다.
주말 내내 파주에 머물렀다. 약속을 잡지도 않았지만, 복작복작한 서울에 나가고 싶지도 않았다. 대신 한 시간 하던 산책을 두 시간으로 늘렸다. 에어팟 끼고 마스크 하고 편한 신발로 나간다. 사람 없는 시간대를 노린다. 우리 동네는 음식점이 많은 대신 술집이 없다. 오후 7시를 넘어가면 백 미터 걸어가야 한 사람 마주칠까 말까 할 정도로 한산하다. 사람이 없는 시간대를 노리는 건 코로나의 영향도 있지만, 노래를 따라 부르거나 흥이 올라 나도 모르게 춤사위가 절로 나오기 때문이다. 붉게 물든 노을 구경, 밤하늘에 초승달 구경, 한참 하다 집에 들어가서 목욕까지 마무리하고 잘 잤다. 다음날 아침, 오랜만에 마주친 회사 사람이 물어본다.
"작가님, 요즘 사회적 거리두기 안 하시던데요."
"제가요? 하루 종일 집에만 있구먼."
"아하, 예전에 올리신 사진을 제가 지금 봤나 봐요. 허허. 코로나 잠잠해지면 한 잔 하시죠."
내가 무슨 사진을 올렸더라. SNS를 살펴보니 산책하며 찍었던 초승달 사진, 동네 돌아다니며 마주쳤던 유기견 사진, 들고양이 사진, 심학산 둘레길에서 우비 입고 찍은 사진이 눈에 띈다. 나는 당당하게 거리두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철없이 돌아다닌다는 오해를 살까 봐 눈치가 보인다. 현관문을 열고 나가면 산이 있고, 논두렁엔 개구리가 울고, 노을이 한눈에 보이는 벌판이 코앞인 시골에 살고 있다는 걸. 그 사람은 모르겠지. 집 앞이라는 걸 강조할 걸 그랬나. 놀러 다닌 것처럼 보였나. 별 생각이 다 든다.
며칠 전 친구로부터 미드 '프렌즈' 레고를 선물 받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타이밍이었던 데다 평소 갖고 싶다 생각했던 물건이라 팔짝팔짝 뛰며 좋아했다. 격한 리액션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친구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되묻는다.
"이상하다. 인스타그램만 보면 손편지랑 꽃 선물을 세상에서 가장 좋아할 것처럼 써놨던데. 우리 승민이 알고 보니까 물건을 좋아하는구나. 역시 사람은 이래서 갖고 싶은 걸 받아야 돼."
"내가?"
그래, 그러니까 모든 화근은 SNS였다. 신기한 거다. 나를 잘 모르는 사람이야 그렇다 쳐도 가까운 사람들이 SNS를 통해 나를 바라본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그들이 해석하는 나와 스스로 생각하는 나. 그 사이에 갭이라도 생기면 혼자 난처해진다. SNS의 본질이란, 수많은 단면 가운데 찰나만을 보여주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그러니 내가 SNS로 보는 지인들의 면모가 얼마나 단편적인 평가였는지, 그 단편으로 얼마나 많은 걸 판단해왔는지, 그 판단은 얼마나 굳건하게 내 시각을 조여왔는지. 거꾸로 보니 비로소 세상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당하면 된다. 그러니 SNS의 허상에 새삼스러워질 필요는 없겠다. 허상도 내가 가진 인상의 일부일 것이고, 허상으로 인한 사람들의 시각도 그들의 일부일 것이다. 이렇게 보여지고 싶다던가 이런 사람으로 포장하고 싶다던가. 역행하는 욕망만 없다면 그곳 또한 내 세상이 되어줄 거란 걸 확신한다. 이러나저러나 코로나 시대에 SNS는 중요한 매개체가 되어줄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