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승민 Oct 03. 2020

결혼에 결벽증이 있다면

가끔 브런치에 올리는 글을 좀 더 다듬지 그러니, 덜 다듬어진 것 같다, 는 말을 듣는다. 아버지는 정색하고 물어보셨다. 퇴고는 안 하니? 반면 이런 책이 나오면 돈 주고 사볼 것 같다 싶은 글을 쓰는 친구들에게 책 좀 내봐, 하면 '좀 더 다듬고' '좀 더 실력을 쌓으면'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어렸을 때, 수첩을 사면 두 장을 못 넘어가는 병에 걸렸었다. 굳이 병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거의 병적으로 집착했기 때문이다. 결벽증인지 낭비벽인지 분간도 안 가는 그 증상을 나는 고칠 수 없었다. 고쳐야 하는 이유도 몰랐다. 패턴은 늘 일관됐다. 마음에 드는 수첩을 구매하고 첫 장을 정성 들여 작성한다. 그 과정에서 한 글자라도 글씨체나 펜의 굵기나 오점이 생겨 마음에 들지 않으면 첫 장을 뜯어냈다. 깔끔하게 뜯겨나가면야 상관없지만, 스프링노트가 아닌 이상은 군데군데 찢겨나간 흔적을 남긴다. 상흔이 생긴 수첩들은 책장 깊숙한 곳에 차곡차곡 쌓인다. (차곡차곡 쌓였던 수첩들은 몇 년 전 무더기로 방출되어 아버지가 사용하기 시작했다)  


수첩은 내가 가진 결벽증의 상징적인 존재일 뿐이었다. 이 버릇을 고치는 데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게 완벽해야 했던 결벽. 편지를 쓸 때면 연필로 미리 써놓고 볼펜으로 덧쓴 다음 다 마르고 지우개로 깨끗이 지워 완벽한 글씨체가 남아야 만족하는 결벽. 유학시절 친구를 사귀면 단어 하나, 문장 하나, 사전을 검색해보고 나서야 문자 답장을 보냈던 결벽. 발표를 할 때면 말할 내용을 담은 원고까지 달달 외워야 안심했던 결벽(발표를 마치기 전까지 매우 예민해진다). 취재원한테 전화를 걸 때면 질문 리스트와 예상 답변까지 죄다 적어 놓고 나서야 전화번호를 누를 수 있었던 결벽.


며칠 전 지인이 물어왔다. 승민이는 결혼에 대한 생각이 있어? 마치 내 얼굴에 '저 결혼 언제 하게요?' 써놓은 것처럼 요즘은 만나는 사람마다 물어본다. 그럴 때마다 내놓는 단골 멘트가 있었다.


"일이나 벌이나 정서적으로나 모든 게 안정되면 하고 싶어요. 진정 내가 이 세상을 혼자 살아갈 수 있는 준비가 됐을 때. 이대로면 평생 혼자여도 괜찮겠다, 싶을 때. 그때 하고 싶어요. 서른 살 됐을 때 그렇게 해야겠다, 마음먹었던 나이가 내 후년이에요."


돌아오는 답은 늘 하나였다.

"내후년? 그럼 사람은 있고?"


그런데 이 지인은 조금 달랐다. 승민아, 그런 생각도 참 좋아. 근데 더 당당해도 돼. 나? 이루지 않았어. 아직 준비도 필요해. 그냥 이 모습이 나야. 싫어? 그럼 가. 이런 자세가 필요해. 그렇게 해도 충분해.


지인의 한마디는 실로 충격적이었다. 진짜? 그래도 될까? 잠깐 생각해봤는데 나쁘지 않다. 저런 당당함. 괜찮을 것 같다. 조금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능력 다 갖추고 입사하는 신입사원이 어디 있으랴. 모든 부모가 완벽한 준비를 끝내고 자식을 가지는 게 아니듯 삶은 계획대로만 흘러가진 않는다. 미래를 위한 삶만 살다 간 영영 때를 놓칠 것 같다. 모든 건 이미 완벽하다, 고 믿기 시작했다.



작가의 이전글 네? 덕질이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