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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민 Oct 06. 2020

지각인생에 등장한 계약서

아침에 등기가 도착할 거란 연락에 얼마나 설레 했던가. 집에 사람이 없으면 재방문 날짜를 적어놓은 쪽지가 붙는다. 두 번째 날짜마저 놓치면 일정 기간 동안 우체국에 보관해둔다는 쪽지가 재차 붙는다. 정해진 기한 내 찾아가지 않으면 반송되는 수순이다. 다시 오실 날에 집에 있을 거란 보장은 없다. 8킬로나 떨어져 있는 우체국에 언제 갈 수 있을지 기약도 없다. 오늘 꼭 받아야 되는 중요한 서류라고 꼼수를 썼다. 현관 옆 서랍장에 넣어주실 수 있으실까요? 그럼요, 집에 돌아오셔서 확인하시고 문자만 꼭 넣어주세요.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방문을 열었다. 노란색 서류봉투를 눈으로 좇았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출간 계약서가 저 안에 들어있다. 환호성을 지른다거나 길길이 날뛴다거나 하는 격한 반응은 일어나지 않았다. 덤덤했다. 며칠 전 편집자한테 원고를 보내면서 왜 좀 더 글을 다듬지 못했을까 후회가 밀려왔다. 한 줄, 한 줄 다시 읽어 내려가기도 민망해 퇴고도 시간에 쫓겨했다. 브런치에 쓰는 글은 대체로 다음날 다시 읽어볼 엄두가 안 났다. 미완성인 글들이 쌓여갔다. 가끔 원고 청탁을 받아놓고 마감기한까지 질질 끌다 그간 저장해둔 글이 뭐 없던가, 살펴보곤 했다. 글을 열자마자 민망해져 창을 닫고 한글파일을 열어 새로 써내기 일쑤였다. 나조차도 읽기 민망한 글을 누가 읽어줄까.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다.


경기콘텐츠진흥원에서 '히든 작가'라는 타이틀로 공모전을 열었었다. 경기도 소재 책방과 출판사와 협업해 신인작가를 발굴하는 프로젝트인 듯했다. 최우수도 우수도 아닌 이외 선정작으로 뽑혔다. 1등도 2등도 아닌데, 기뻐해도 될까, 라는 마음이 앞섰다. 프로젝트 진행 담당자는 선정된 작품을 엮어서 묶음집으로 출판할 예정이라고 전해왔다. 충분히 좋은 글이니까 선정된 거예요. 퇴고하시는 건 좋은데 글이 처음이랑 너무 달라지면 안 되니까 마음 편안하게 가지세요. 빠르면 12월. 처음으로 공동저자가 되는 건데, 이 멜랑꼴리 한 기분은 뭘까. 퇴근하고 내내 곱씹어보니 오버랩되는 일들이 하나 둘 떠오른다.


배드민턴 승급 대회에서 여복 준우승을 했을 때였다. 8팀은 1등까지 승급, 9팀은 2등까지 승급할 수 있도록 규정해놓았다. 우리가 나갔을 때 마침 9팀이었다. 한 팀만 없었어도 승급할 수 없는 여건이다. 다시 도전해서 정정당당하게 승급하고 싶었다. 파트너로 나간 동생은 달랐다. 언니, 하늘이 주신 기회야. 2등이 어디야. 환호했다. 경기 중에 실수했던 것들이 하나 둘 떠올랐다. 저런 실력으로도 승급을 해? 보이지 않는 손가락질과 수군거림이 느껴졌다.


배드민턴 전국대회를 나갔을 때도 리그전에서 다 떨어졌다. 집에 갈 채비를 하는데 뜬금없는 소식이 들려왔다. 패자부활전으로 올라갔단다. 얼떨결에 우승을 가리는 경기를 치렀다. 당연히 졌다. 하지만 결과는 준우승이었다. 우리와 대결해 격차를 벌려가며 승리를 거머 줬던 팀들은 고스란히 3위, 4위로 밀려났다. 부끄러웠다. 라켓을 쥔 자세가 나랑은 다른 구력자들이었다. 끝까지 민망해하는 나를 둘러싸고 사람들은 운도 실력이라며 다독였다. 나만 괜찮지 않았다. 같이 나간 파트너 동생은 덩달아 민망해하면서도 환호했다. 진심을 다해 같이 환호하지 못해 나는 또 미안해졌다. 


지금 일하는 팀도 운 좋게 들어왔다. 다른 부서에 있다가 '잠깐 공석이 생겼으니 임시로 가서 한 달만 하고 돌아오라'라고 했던 자리였다. 그렇게 6년째 같은 팀, 같은 자리에서 일하고 있다. 난 공식적으로 이 팀에 오기 위한 준비를 한 것도, 면접을 본 것도, 이력서를 낸 것도 아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새로 생긴 코너가 호평이었고, 지나가다 방송을 본 나는 그저 '저런 코너는 어떤 작가가 만드는 걸까. 나도 언젠가 저런 코너에 가서 일해보고 싶다' 생각했던 게 전부였다. 스치듯 가졌던 생각이 이루어진 거라면 그건 기적이지 노력의 결과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버티는 것도 능력이라 말하지만, 글쎄. 마뜩잖다. 그냥 운 좋게 줄 타고 들어온 느낌이랄까. 그 줄을 그저 잘 붙들고 있는 느낌이랄까.


그러니까 나는 가진 것에 대해 있는 그대로 기뻐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받아들이고, 기뻐하고, 꾸밈없이 누리는 것을 못하는 성격이다. 대학생 대상으로 진행했던 강연에서 "꾸준히 뭔가 하나를 하고 있으면 잭팟이 터져요. 먼저 올지, 나중에 올지의 차이예요. 그렇게 갑자기 찾아오는 기회는 준비된 사람한테만 오는 거예요. 얼마나 즐거운데요!" 입이 닳도록 강조했는데, 정작 나는 감정의 줄다리기만 하고 있다. 


빠른 년생이라 학교를 1년 빨리 들어간 것 빼곤 내 인생 모든 게 더디고, 느렸다. 가끔 밥상머리 화두로 나오는 옛날이야기 중 유치원 수영 시절 에피소드가 있다. 미취학 아동일 때 엄마는 나를 수영장에 보냈다. 이따금씩 내 새끼 수영 잘하나 보러 온 엄마는 웃음을 금치 못했다. 레일을 마치면 누구보다 빨리 쫄랑쫄랑 뛰어가서 다음 타자로 기다리는데 막상 물에 뛰어들면 딱히 잘하지도 못했다는 거다. 넌 참 열심히 하는데, 이상하게 잘하진 못하더라고. 


싹싹하고 능숙하게 잘 해내는 타입이 아니다. 뭐든 오랜 시간을 걸려 고민하는 성격이다. 진로 역시 남들보다 늦게 결정한 편이고, 석사과정도 동일본 대지진을 핑계로 휴학하는 바람에 학위 따는 데 5년이나 걸렸다. 졸업논문 역시 10개월 동안 방향을 잡지 못해 헤매고 헤맸다. 마지막 두 달, 모든 에너지를 올인해 120장을 꾸역꾸역 채워냈다. 다행히 결과는 좋은 편이었지만, 그 과정이 매우 더뎠던 탓에 주변 교수님들은 애간장을 탔다. '우리가 가장 걱정을 많이 했는데, 이런 전개를 보여줄 줄이야!' 최종 심사가 끝나고 교수님은 진심으로 놀라워했다. 


아르바이트도 마찬가지였다. 대학부터 대학원까지 장장 6년이란 시간을 일하면서도 그 흔한 칭찬 한 번 못 들어봤다. '이제 일 좀 하네'라는 소리를 처음 들은 것도 5년이 지나 서다. 취재도 마찬가지다. 현장에 가면 답이 나온다지만, 내 눈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누구는 CCTV를 기가 막히게 찾아내고, 누구는 주변 상인들을 어르고 달래 정보를 캐낸다. 나에겐 붙임성도 관찰력도 없었기에 그저 오랜 시간 현장에 머무는 일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러니 지각인생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게다가 기회가 다가와도 기뻐하기는 커녕 머뭇거리기 바쁘다. 하루는 친한 선배가 그랬다. 운이 들어오면 그 기세에 올라타서 더 잘하면 되는 거야. 그게 진짜 실력이야. 조금 더디고 느렸을 뿐 내가 지나온 시간들은 매 순간이 지금을 위한 마중물이었다고 여겨보기로 했다. 좀 더 잘할 걸, 이걸로 괜찮을까, 보다 잘해보겠다 달려들기로. 그렇게 살아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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