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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민 Oct 08. 2020

단잠을 깨운 목소리

정동진에서 192시간

"아니, 그니까 야, 내 말을 들어보라고. 그 새끼가 지랄을 한 거지. 네가 고생이다 야. 망할 놈의 새끼. 아무튼 미안하고."


누군가의 통화 소리에 잠이 깼다. 요즘도 KTX에서 떠드는 사람이 있다니. 보기 드물까 싶다가도 가끔 눈에 띈다. 통화소리에 욕이 한층 더해지니 신경 쓰이기 시작한다. 통화는 끊일 줄 모르고 이어진다. 전화는 나가서, 기본 아닌가요 고요함 속 무언의 외침이 이어졌다.


열차칸 자동문이 열리고 역무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들어온다. 잘됐다. 마스크를 코에 걸쳐만 놔도 주의를 받는 요즘이니 통화를 금지시켜주시겠지.


웬 걸 그냥 지나간다. 귀를 쫑긋 기울여보니 통화 상대가 말하는 타이밍인 모양이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말이 없다. 역무원이 열차 한 칸을 거의 지나가고 뒷 문이 열릴 때쯤 기차는 터널로 들어간다. 고오오오- 자동세차장에서 들을 법한 소리가 열차를 메운다. 다시 터널 밖으로 나왔다. 


"야이 새끼야 아니라니까."


아, 야속한 타이밍이여.


읽다만 책이 눈에 들어온다. 여행길에 사노 요코가 쓴 '사는 게 뭐라고'를 가져왔다. 어제 선물 받은 책이다. 선물을 준 사람은 '사는 게 뭐라고'와 '죽는 게 뭐라고' 두 권을 가져와 나와 또 다른 친구에게 건넨다. 어느 책을 누구한테 줄까 한참 고민하느라고 편지를 못썼다는 귀여운 변명과 함께. '사는 게 뭐라고'를 받아 든 나를 보더니 "어? 아니다, 둘이 바뀌었네? 아니다. 그게 더 나을 수도 있겠다." 의미심장한 말도 남겼다. 이유는 묻지 않았다. 읽으면 알겠지.


책이 꽤 마음에 든다. 옅은 복숭아색 표지. 파랗게 빛나는 가느다란 실선으로 스모(일본의 씨름) 선수가 하나, 카메오 브로치를 달 것 같은 백작부인이 둘, 양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허공을 바라보는 남성과 배가 나온 여성의 전신을 그려 넣었다.


시크한 독거 작사의 일상 철학, 이라는 부제에 걸맞게 '아, 졸리다. 좀 더 자곤 한다'라는 혼잣말도 종종 등장한다. 아직 몇 페이지 읽지 않았는데 그녀가 졸리다, 할 때마다 나도 스르르 잠이 온다. 몇 번 자다 깨다를 반복하는 사이 앞자리 전화통화 끝난 듯하다. 기차는 어느덧 정동진역에 가까워지고 있다. 예민했던 순간은 저 뒤에 놓아두고 달린다. 사는 게 뭐라고.



*미니팁

동해행 기차를 탈 때 왼쪽 좌석을 선택하면 정동진역 도착하기 10분 전부터 아래와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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