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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민 Oct 08. 2020

상식이 깨지는 곳

정동진에서 192시간

자주 가는 서핑 강습소가 있다. 말이 강습소지, 숙박비 2만 원만 내면 저렴한 가격에 서핑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강원도 수많은 해변 가운데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바닷가 마을에 있다. 사람은 없는 편이다. 즐겨 찾는 이유다.


(그럴 리 없겠지만) 혹시 장사할 생각이 없으신가, 생각이 들 정도로 상술에 관심이 없어 보인다. 격한 호객도 리액션도 없다. 여기 서핑하기 꽤 괜찮은 데라서요, 한 번 오시면 어때요? 정도의 선에서 홍보한다. 부담스럽지 않다. 무리해서 사람을 바다로 내밀지 않는다. 돈 아까워요, 오늘은 들어가지 마세요. 여유로움과 무관심 사이, 그 어디쯤이다. 그들의 쿨함이 때론 나의 존재는 잊힌 것인가, 생각 들게 만들기도 한다. 그런 그들의 무색무취한 응대를 나는 좋아하는 편이지만.   


지난해 여름부터 여섯 번 정도 방문했다. 단 한 번도 제시간에 픽업을 나온 적이 없다. 가장 빨리 왔던 건 (굳이 적어보자면) 5분 늦게 도착했을 때였다. 그땐 강릉역으로 픽업을 나왔었다. 샵에서 30분 거리다. 서핑 샵을 한차례 리뉴얼하면서 픽업장소는 정동진역으로 바뀌었다. 15분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라는 단조로운 문구로 홍보했다. 거리도 시간도 반으로 줄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늦는다.


정동진역을 나오며 잠시 상상했다. 샵의 마스코트인 히비스커스 꽃이 그려진 하얀색 스타렉스 차량이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늦는다는 연락도 없다. 내가 먼저 해볼까, 접었다. 알아서 오겠지. 도착하면 전화하겠지. 괜히 전화하면 운전을 서두를 테니 좋을 게 없다. (다시 생각해보니 서두르지 않을 것 같기도 하다) 역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날씨가 좋네, 바람이 좋네, 하는 사이 10분이 훌쩍 흘렀다. 그때 문자가 날아들어왔다. 밥 먹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며 빨리 먹고 갈 테니 근처 카페에서 기다려줄 수 있겠냐는 별다른 여지없는 부탁 문자였다. 밥보다 중요한 건 없다. 그러시라 했다. 날씨가 좋으니 봐드릴게요, 기다렸다는 티 좀 내보려다 그만뒀다. 해변에 나가 있을 테니 천천히 오라 했다. 답장은 없었다. (저기요..)


여행은 늘 상식이 깨지는 곳이다. 여행지가 그렇다. 분단위로 계획을 짜도 틀어지기 마련이니 마음은 비우는 게 정신건강에 낫다. 늦는 이에 대한 너그러움이 흘러나온 건 여행 첫날이라서 이기도 하지만, 그런 너그러움을 많이 받고 살아서이기도 하다.


몇 주 전 친한 동생과 광화문에서 저녁 약속이 있었다. 오전엔 부모님과 파주 드라이브를 다녀왔다. 출발할 때부터 시간이 빠듯할 것 같았다. 막상 외출해보니 시간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지체됐다. 나간 지 한 시간 만에 동생한테 연락을 넣었다. 부모님이랑 외출을 나왔는데 빠듯할 것 같아 한 시간만 늦출 수 있을까. 동생은 흔쾌히 오케이를 외쳤다.


가족은 달랑 세 명이지만 고집은 각기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 약속이 있어 마음이 조급한 사람. 때를 놓쳐 배가 고픈 사람. 코로나 시대에 사람 많은 식당엔 들어가고 싶지도 않은 사람. 나와 엄마와 아빠. 우리 셋은 그 작은 차 안에서도 아웅다웅했다. 언어로 표현하진 않았다. 각자의 생각을 꼭 붙든 표정으로 차창밖 먼 산을 바라봤을 뿐이다. 이도 저도 아닌 시간이 흘러갔고, 덕분에 난 예정보다 늦게 출발했다.


출발하며 또다시 동생에게 연락을 넣었다. 하필 자유로에 사고가 생겨 막힐 리 없는 시간인데 막힌다. 꽉 막힌 고속도로는 답이 없다. 원래 안 늦는데, 라는 변명은 필요 없다. 거두절미하고 정말 미안합니다, 로 시작하는 반성문을 동생에게 적어 보냈다.


동생은 이미 오래전에 광화문에 와있는 듯했다. 가기로 한 음식점 사전답사까지 마친 눈치였다. 나였다면 어땠을까. 미안한데 미안함을 표현할 길이 없다. 답장을 머뭇거리는 사이 또 한 번 동생으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언니, 어차피 웨이팅이 있을 것 같아서 명단은 걸어놨어요.

혹시...

저는 빙수를 먹고 있어도 될까요?

지나가는데 빙수가 자꾸 저를 부르네요 ㅠㅠ


귀여운 너그러움에 미안함은 배가 됐다. 미안해를 몇 번쯤 반복해대는 나를 배려해 동생은 잠시 카톡을 중단하겠다는 뜻을 밝혀왔다.


저는 빙수와 잠시 깊은 대화를 할 테니

걱정 말고 천천히 와요 언니


너그러움은 일상에서 빛난다. 나의 너그러움도 이곳 바다에서 두 시간 떨어진 서울까지 이어지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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