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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민 Oct 11. 2020

1997년, 방명록

차마 보내지 못한 마음을

유리병에 담아 바다로 던져버리려고

우리가 함께 찾았던 정동진을

9년 만에 다시 찾았구나.


그 유리병을

바닷가 경계근무를 서던 군인 아저씨가 주워

그 안에 든 편지를 읽는다면

제대로 청승맞겠다며 웃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하지만 지금은

고래가 아플까 봐 걱정이 되어서

바다로 아무것도 던질 수 없는 사람이 되었네.


그래도 우리 '낭만'을 잃어버리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 너무 좋다.


앞으로도 나의 낭만에 함께 해주길!




정동진역 앞 1997년에 생긴 카페가 있다. 소파에 앉아 내 방이 이랬으면 좋겠네 중얼거린 건 진심이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2층 건물. 가운데가 뻥 뚫려 비교적 천장이 높아보이는 구조. 빙 둘러 만들어진 2층석에 앉아 고개만 살짝 돌리면 새파란 하늘과 그보다 좀 더 새파란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곳에선 아주 오래전부터 방명록을 운영하고 있다. 운영이라는 단어를 고른  방명록을 적는 스프링 노트 표지에 2020.08~ 날짜가 쓰여있고, 언제든 다시 찾아와 방문했던 날짜를 말하면 주인장이 그때  방명록을 찾아주는 서비스가 시스템화 되어있기 때문이다.


나도 동참했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정동진이고 커피맛이 딱히  취향이 아니라 재방문의사는 거의 없었던 카페지만,  방명록을 핑계 삼아  번쯤은  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그렇게 적어 내려  방명록을 앞에 두고 있다가 문득 다른 사람들은 어떤  적었을까 뒤적거렸다. 결혼한  20 만에 찾은 오랜 부부. 남편과 아내 이름 석자 사이에 서툴게 그려 넣은 하트.  결혼한 신혼부부의 신혼여행 2  후기. 코로나로 마음에  드는 결혼식을 올리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네가 곁에 있어 행복하다는 달달한 문구. 친구들과의 우정여행을 소중하게 새겨 넣은 글귀나 동행한 사람들을 하나하나 그려 넣어 우정을 기념하는 글도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눈에 넣고 싶었던 글이었다. 철책근무를 서는 군인들이 자주 보이는 동해의 향기가 물씬 묻어 나오는 글. 힘든 연애를 마치고 어렵게 발걸음을 옮겼을 바다. 꾹꾹 눌러 담은 그리움이 행여나 젖을세라 몇 번이고 눌렀을 유리병 뚜껑. 그 모든 순간들이 마치 내가 겪은 것처럼 머릿속에 둥둥 떠다녀서 몇 번이고 다시 읽어 내려갔다. 하지만 가장 좋았던 건 이제는 고래가 아플까 봐 그 어떤 것도 바다에 던지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구절이다. 유리병에 그리움을 담아낼 정도로 여린 사람이었으니 고래의 아픔도 공감하는 사람일 수밖에 없겠구나. 얼굴도 이름도 나이도 모르지만, 좌절하면서도 꿋꿋하게 버텨 좋은 어른으로 성장해왔을 그녀가 참 예쁘다 생각했다.


바로 옆 전복 순두부 짬뽕집이 몇 개월 전이랑 맛이 다르다던가. 커플 사이에 껴서 여행을 하고 있다던가. 강원도의 고즈넉함을 고스란히 담아낸 강릉 바우길을 꼭 가보시라던가. 다음번엔 꽤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다시 오고야 말겠다던가. 내가 적은 병명록과는 차원이 다른 글이었기에. 이왕이면 들춰보는 사람들의 마음도 따뜻하게 만져줄 수 있는 글을 적어야겠다 생각했기에. 나는 그 글이 좋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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