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방명록

by 알로

차마 보내지 못한 마음을

유리병에 담아 바다로 던져버리려고

우리가 함께 찾았던 정동진을

9년 만에 다시 찾았구나.


그 유리병을

바닷가 경계근무를 서던 군인 아저씨가 주워

그 안에 든 편지를 읽는다면

제대로 청승맞겠다며 웃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하지만 지금은

고래가 아플까 봐 걱정이 되어서

바다로 아무것도 던질 수 없는 사람이 되었네.


그래도 우리 '낭만'을 잃어버리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 너무 좋다.


앞으로도 나의 낭만에 함께 해주길!




정동진역 앞 1997년에 생긴 카페가 있다. 소파에 앉아 내 방이 이랬으면 좋겠네 중얼거린 건 진심이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2층 건물. 가운데가 뻥 뚫려 비교적 천장이 높아보이는 구조. 빙 둘러 만들어진 2층석에 앉아 고개만 살짝 돌리면 새파란 하늘과 그보다 좀 더 새파란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곳에선 아주 오래전부터 방명록을 운영하고 있다. 운영이라는 단어를 고른 건 방명록을 적는 스프링 노트 표지에 2020.08~ 날짜가 쓰여있고, 언제든 다시 찾아와 방문했던 날짜를 말하면 주인장이 그때 적은 내 방명록을 찾아주는 서비스가 시스템화 되어있기 때문이다.


나도 동참했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정동진이고 커피맛이 딱히 내 취향이 아니라 재방문의사는 거의 없었던 카페지만, 그 방명록을 핑계 삼아 한 번쯤은 더 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그렇게 적어 내려 간 방명록을 앞에 두고 있다가 문득 다른 사람들은 어떤 걸 적었을까 뒤적거렸다. 결혼한 지 20년 만에 찾은 오랜 부부. 남편과 아내 이름 석자 사이에 서툴게 그려 넣은 하트. 갓 결혼한 신혼부부의 신혼여행 2일 차 후기. 코로나로 마음에 썩 드는 결혼식을 올리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네가 곁에 있어 행복하다는 달달한 문구. 친구들과의 우정여행을 소중하게 새겨 넣은 글귀나 동행한 사람들을 하나하나 그려 넣어 우정을 기념하는 글도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눈에 넣고 싶었던 글이었다. 철책근무를 서는 군인들이 자주 보이는 동해의 향기가 물씬 묻어 나오는 글. 힘든 연애를 마치고 어렵게 발걸음을 옮겼을 바다. 꾹꾹 눌러 담은 그리움이 행여나 젖을세라 몇 번이고 눌렀을 유리병 뚜껑. 그 모든 순간들이 마치 내가 겪은 것처럼 머릿속에 둥둥 떠다녀서 몇 번이고 다시 읽어 내려갔다. 하지만 가장 좋았던 건 이제는 고래가 아플까 봐 그 어떤 것도 바다에 던지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구절이다. 유리병에 그리움을 담아낼 정도로 여린 사람이었으니 고래의 아픔도 공감하는 사람일 수밖에 없겠구나. 얼굴도 이름도 나이도 모르지만, 좌절하면서도 꿋꿋하게 버텨 좋은 어른으로 성장해왔을 그녀가 참 예쁘다 생각했다.


바로 옆 전복 순두부 짬뽕집이 몇 개월 전이랑 맛이 다르다던가. 커플 사이에 껴서 여행을 하고 있다던가. 강원도의 고즈넉함을 고스란히 담아낸 강릉 바우길을 꼭 가보시라던가. 다음번엔 꽤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다시 오고야 말겠다던가. 내가 적은 병명록과는 차원이 다른 글이었기에. 이왕이면 들춰보는 사람들의 마음도 따뜻하게 만져줄 수 있는 글을 적어야겠다 생각했기에. 나는 그 글이 좋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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