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승민 Oct 11. 2020

할머니 손에 들린 식칼

금진은 오래된 바닷가 마을이다. 골목골목에 붙여진 이름도 금진뒷길, 금진앞길, 라는 식이라 참으로 투박하고 단순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마을과도  어울린다. 세련된 해변도 아니고, 커피 향이 나는 해수욕장도 아니다. 곳곳에 쓰러져가는 빈집이 많고 주민 대부분은 고령자다.


, 물론 학교도 있다. 1962년에 세워진 옥계초등학교 금진 분교장. 한때 금진초등학교라는 이름도 붙었지만, 학생수가 줄어드는 바람에 다시 금진 분교장으로 바뀌었다. 2층짜리 단층에 연한 갈색을  벽돌 건물이다. 바라만 봐도 편안해지는 색감이다. 3학년과 5학년이 같은 교실을 쓰는  같다. 6학년 교실도 하나 있다. 나머지는 과학실과 교무실, 행정실. 입학생은 없다는 뜻이겠다. 전교생 여섯 , 선생님  명이 맥을 이어가고 있다.


학교는 묵고 있는 숙소 바로 뒤편에 있다. 자주 산책 나가는 길목이다. 마을은 작지만 숨은 골목길이 많아 탐방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아침저녁으로 짬이 날 때마다 거닐곤 한다. 좀처럼 사람 보기 힘든 동네인데, 오늘은 허리가 잔뜩 굽은 할머니 한 분이 작은 수레를 끌고 느릿느릿 걸어가시는 걸 보았다. 할머니의 걸음만큼이나 이곳에서의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면 참 좋겠다, 잠깐 상상하는 사이 할머니의 시야에도 내가 들어온 모양이다.


"어디서 왔누?"

"경기도 파주요."

"아이고, 멀리서도 왔네."


"할머니는 어디 가세요?"

"여 좀 가져가려고."


한 손에 식칼을 들고 계신다. 무서울 법도 한데 식칼마저 정겹다. 할머니가 가리킨 곳은 작은 텃밭. 정성스럽게 고추를 따고 느리지만 익숙한 손놀림으로 부추를 베어낸다. 매일 아침 마당에 열린 고추 하나에 환호하는 파주 우리집이 생각난다. 오늘은 세 개뿐이네, 한 사람당 하나씩만 드셔야 합니다, 라는 대화가 오가는 우리 텃밭보다 훨씬 부자다.


"서울엔 이런 거 없으니까 신기하재?"

"아니요, 저도 시골 살아요. 근데 할머니는 고추가 많아서 부럽네."


대화는 끊어질 듯 이어졌고 이어질 듯 끊겼다. 할머니는 민박을 내주고 있는데, 요즘은 코로나라 잠시 접었다고 하셨다. 30년 전에 이곳 금진 마을로 터를 옮겼고 쭉 살았다고. 네가 묵고 있는 숙소는 하루에 얼마나 하는지, 연휴라 사람들이 많이 왔는지, 물어오신다. 지금 베는 부추는 오늘 저녁 열무김치에 넣을 거란다. 분명히 아주 조금만 넣을 거라고 하셨는데 텃밭 구석구석에 숨어있는 부추들을 용케도 찾아내어 베고 또 벤다. 일곱 평 남짓 되어 보이는 작은 공간에 있을 건 다 있다. 무도 있고. 부추도 있고. 파도 있고. 가지도 있고. 빨간 고추랑 초록 고추도 있고. 웬만한 반찬거리는 다 나올 것 같다.


부추를 다 베고 나서도 할머니는 밭고랑 사이을 느릿느릿한 발걸음으로 걸어 다녔다. 마트에서 식재료를 찬찬히 살피는 손길처럼 이쪽에 있는 이파리 한 번 뜯어주고, 저쪽에 난 잡초 하나 뽑아주며 세심히 보살핀다. 그 와중에 가늘게 피어나는 파들이 밟히는 게 마음에 걸리시는지 파밭을 걸어 다닐 땐 꽃게 자세가 되어 엉거주춤한 자세가 되기도 했다. 아주 미세하지만 발걸음 하나 손길 하나에 마음이 담긴 것 같아 한참을 들여다봤다.


"혼자 여행 왔으면 심심하겠네."

"서울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혼자 있고 싶어서 온 거예요. 너무 좋아요."

"그랄 때도 있는 거지. 그럼 좋겠네."


부추 사냥을 마친 할머니는 다시 도로에 자리를 잡고 앉으신다. 하나하나 손질해야 한다며. 시들어버린 부분을 떼어내고 뿌리에 붙어있던 흰 껍질을 떼어낸다. 그 작업은 아주 천천히 진행되고 있어서 나도 따라 주저앉았다. 작업은 세분화되어있었다. 부추를 가지런히 바닥에 놓고. 다시 가지런히 모양을 잡은 다음 하나하나 들어 손질하고, 손질한 부추를 한 손에 쥐고 남은 이파리들은 흙바닥에 쓸어 버리고. 다음 작업으로 넘어갈 때마다 찍어도 돼요? 물어보는 나를 신기한 눈초리로 쳐다보면서도 카메라를 갖다 대면 움직임을 잠시 멈춰주시는 센스도 발휘하신다.


서울에 돌아가 다시 상암동의 사무실에 앉아 이따금씩 기지개를 켜며 이곳을 떠올릴 때 부추 따던 할머니도 같이 곱씹고 싶었다. 우리 할머니 못 뵈러 간지도 오래인데, 엉뚱한 곳에 붙어있네, 싶어 민망하기도 했고. 우리 할머니 열무김치도 기깔나게 맛있는데 말이다.  

 


식칼들고 텃밭 나오는 여자
꽁꽁 숨어있어도 다 찾아낸다
그렇게 모인 부추들은 제법 양이 꽤 된다
이제부터 다듬기 작업 시작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가지런히 담긴 반찬거리들
고생한 식칼


작가의 이전글 1997년, 방명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