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승민 Oct 11. 2020

술자리 눈치싸움

일주일 동안 금진에 머무를 거라 하니 지인 두 명이 하루 놀러 온단다. 둘 다 같은 회사에서 일했던 친구들인데 회사를 옮기고서 어느새 커플이 되어있다. 그러니까 커플여행을 굳이 내가 있는 곳으로 오겠다는 거다. 그렇다. 나는 커플들에게 인기가 좀 있는 편이다. 굳이 둘이 가면 될 것을 나를 껴서 가려고 하는 커플이 몇 있다. 이유는 모르겠다. 둘이 염장질을 해도 너그럽게 바라봐줘서(바꿔 말하면 아예 신경을 안 써서) 그런 걸 수도 있겠다.


강원도 동해, 하면 회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나 역시 그런 편이다. 이 친구들은 나의 그런 편을 넘어서서 회에 목숨을 건 것처럼 달려들었다. 한 명은 취직시험을 막 마치고 동해로 달려온 터라 스트레스가 쌓였다며 오늘 밤은 취하겠노라 다짐했단다. 바람직한 태도다. 무언가를 위해 힘을 쏟고, 고생했으니까 오늘만큼은 취해야겠다는 각오. 얼마나 당당하고도 귀여운 마인드인가.


항구 횟집을 서너 군데 돌아다니다 마음에 드는 곳을 발견했다. 구수한 강원도 사투리를 써가며 호객했던 이모가 서있던 횟집이다. 해삼도 먹고 싶고, 멍게도 먹고 싶고, 오징어도 먹고 싶고, 광어에 방어에 우럭까지 다 먹고 싶은데 어떡하죠?라는 여섯 개의 눈동자에 이모는 선심을 썼다. 보란듯이 가장 큰 놈으로 잡아올린다. 수조에 없던 해삼을 제외하고 다 맛보게 해주겠다며.


숙소로 돌아오니 마당 한편에선 바비큐 파티 준비가 한창이다. 벽돌로 만든 사각 모양의 화로 안에 모닥불까지 피워놨다. 자갈마당 곳곳에 우뚝 솟은 봉끼리 연결을 시켜놓고 연결시킨 줄마다 전구가 달렸다. 해가 지고 전구에 하나둘 불이 들어오면서 분위기는 무르익었다.


횟집에서 차려준 접시에 포장을 하나하나 벗겨내고 나무로 만든 테이블 위를 채워나간다. 마지막 소주잔까지 세팅하고 나니 제법 그럴싸하다. 방어회를 담았던 접시 하나를 비워길 무렵, 옆에 앉은 친구가 뒤를 힐끔 바라본다. 먹고 싶은 눈치다. 남자 친구를 조르기 시작한다. 고기 한 줄만 달라고 해봐, 오빠.


사전에 신청을 해야 되는 바비큐였다. 매일 저녁 화이트보드에 메뉴를 정해서 올려놓는다. 원하는 사람은 이름을 적고 스텝은 명단을 확인해 음식을 주문하는 식이다. 미처 확인하지 못했고, 다들 회를 먹고 싶어 했기에 별다른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야외라도 모르는 사람들과 섞여 식사를 하는 것에 나도 친구들도 부담을 느낀 것도 있었다.


하지만 사장님 입장은 달랐을 거다. 엄연히 서퍼들을 위한 숙박업소인데 내 지인이라는 이유로 특별히 수락해준 것이었다(다음날 파도가 괜찮으면 강습을 받는다는 전제가 깔리긴 했다). 그래도 이왕이면 다른 곳에서 음식을 사 오는 것보다 이곳에서 준비한 음식을 먹어주길 바랬을 거다. 직접 구워내는 고기인만큼 사장님, 맛있어요! 모두가 하나 되어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어가고 싶다, 생각했을 수도 있다. 널찍널찍한 마당인 만큼 테이블은 많고 자리도 띄엄띄엄 있으니 달리 신경 쓰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 모든 상황을 앞뒤 잘라버리고 '돈을 드릴 테니 고기를 달라'고 말하는 건 다르다. 우리끼리만 재미있게 떠들고 웃는 것 같아 앉아있는 내내 살짝 눈치가 보이기도 했는데, 고기까지 달라고 하면 어떨까.


그러나 여자 친구를 앞에 둔 남자는 강하다. 성큼성큼 고기를 굽고 있는 사장님한테 다가가 돈을 추가로 내고 고기를 조금 살 수 있을까요, 당당하게 묻는다. 내 예상이 맞았다. 미리 신청을 받아놓고 제공하는 거라 여분이 없다는 게 이유였다. 조금 더 센스가 더해진다면 한 점이라도 주면서 그러게 신청하지, 으이그. 이것밖에 못줘서 미안하지만 없단다, 해주길 바랬다. 서로 윈윈 하는 훈훈한 결말. 그러나 그건 나의 바람일 뿐 요구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었다.


친구 중 한 명이 슬슬 취기가 올라오는 모양이었다. 목소리가 커지고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모두가 귀여워하는 골든 레트리버에게 "저리 가 이 무서운 놈아!" 외칠 때면 나도 모르게 눈치가 보였고, 마이크 잡고 분위기 잡고 노래 한 곡 구수하게 뽑아내는 시간에 "못 부른다" 고 중얼거린 혼잣말이 혹여나 들릴까 식은땀이 흘렀다.


그런데 말이다. 어느 순간 그런 생각이 드는 거다. 나는 왜 눈치를 보고 있을까. 내가 왜 이곳의 스텝들의 눈치를 보고 있을까. 그게 과연 상식적이고 도리를 지키는 거라서 눈치를 보는 걸까. 이곳에서의 남은 나의 휴가를 마음 편하게 보내려고 머리를 쓰고 있는 것인가. 생각을 고쳐먹기로 했다. 나를 만나러 와준 친구들을 우선시해야겠다. 술을 먹으면 조금 시끄러울 수도 있는 거고, 회를 먹다가도 고기가 먹고 싶어질 수도 있는 거고. 개가 무서우면 무서운 놈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거다. 비틀거리다 누군가에게 상해를 입히는 것만 아니라면 얼마든지 비틀거릴 자유는 있다. 남은 횟감을 잘근잘근 씹으며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고, 그 후론 다시 편안하게 술자리를 즐겼던 것 같다.


다음날, 숙소 스텝 한 명이 그런다.

"언니 어제 같이 놀려고 부르려고 했는데, 너무 즐거워 보여서 몇 번 고민하다 말았어요."


즐거워보였다니. 속도 모르고. 귀여운 배려에 고맙지만, 이제 눈치 게임은 안 할란다. 

작가의 이전글 강태공의 매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