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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민 Oct 13. 2020

파도에 몸을 맡긴 1초

정동진에서 192시간

이상하다. 파도가 더 무서워졌다.


어릴 적 돌고래반인가 개구리 반인가 수영을 배운 걸로 알고 있는데 사진으로만 남았을 뿐 내 몸이 기억하는 게 없다. 배영만 간신히 할 뿐 자유형을 못 한다. 그렇다 보니 조금만 발이 바닥에 닿지 않아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육지에서 1초는 순식간이지만 파도의 소용돌이 속 1초는 1분처럼 길다. 파도에 떠밀려 아니, 파도의 일부가 되어 휘말릴 때면 그 1초에 슬로우가 걸린다. 해안가에 나와 있는 사람들의 표정, 이대로 죽을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 허공에 붕 뜬 내 몸에 대한 이질적인 감각. 그 모든 것들이 아주 천천히 흘러간다. 세탁기 안에 흠뻑 젖은 빨랫감처럼 데굴데굴 감긴다고 하여 통돌이라는 이름이 붙은 모양이다. 나 통돌이 당했어, 하면 파도에 몸이 휘감긴 채 데굴데굴 굴렀다는 뜻이다.


서핑이 위험한 이유는 통돌이는 누구나 당할 수 있는다는 점에 있겠다. 통돌이를 당하는 과정에서 보드가 날아가고, 날아오는 보드에 몸을 맞는다. 발목과 보드를 이어주는 리시(줄)에 휘말리기도 하고, 때론 리시가 족쇄가 되어 날아가는 보드에 몸도 붕 뜨는 경우도 생긴다. 베테랑이라면 물속에서 잠깐 잠수를 한다던가 재빨리 리시를 붙잡아 보드의 위치를 확인한다던가 조금은 능숙하게 대처하겠지만, 초보자에겐 글쎄. 1초가 1분 같은 지라 내 몸 간수하기도 바쁘다.


위에 적은 과정들은 생각보다 잦은 빈도로 발생하지 않지만, 생각 외로 바다 위 크고 작은 사고는 많다고 하니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다. 지난해 한 번 통돌이를 제대로 경험한 이후로 파도에 대한 두려움이 걷잡을 수 없이 쌓여갔다.


리시가 끊어지면 어떡하죠

서핑하다 죽을 확률은요

수영 못해도 살 수 있나요


물이 무서울 땐 들어가지 않는 게 좋아요, 웬만하면 없는 말 안 하는 사람들인데 이 정도 파도로 죽진 않아요, 확언을 내놓는다. 그래서 조금 안심했다. 리시가 끊어지고 보드가 날아가고 발이 닿지 않는 내가 허우적거리다가 숨이 차오를 확률은 어쩌면 천만분의 1쯤 될 수도 있겠다. 그 눈곱만 한 확률을 두고도 난 무서워하는 거다. 아직 걸어본 길이 아니니까.


배드민턴만 그런 줄 알았다. 처음 라켓을 잡은 사람은 길게는 1년 동안 벤치에만 앉아 있다가 돌아간다. 텃세를 느끼고, 소외감을 느낀다. 그 시간을 버텨낼 힘이 없으면 배우지 못한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쳐주는 사람이 없고 시선을 내주는 이가 없는 곳. 살아남으려면 열심히 말을 붙이고, 쳐주세요 부탁도 해보고 때론 서틀콕도 조공하며 달라붙어야 한다. 배운다는 건 어쩌면 모두 같은 맥락인 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나는 서핑을 배우는 와중에도 배드민턴이랑 시종일관 비교를 해대고 있는 거다. 나는 지금 라켓을 처음 들고 체육관을 찾은 사람인 거야. 내가 가진 이 두려움은 배드민턴 치다가 라켓에 맞아 죽을 확률을 두고 겁내는 것과 마찬가지야. 잘 타는 사람들 옆에 따라붙어서 저 멀리 라인업도 나가봐야 하는 거야. 배드민턴 게임 중에 헛스윙도 하고 가끔은 넘어질 때도 있듯이 파도에 부딪혀봐야 파도에 대한 감각 또한 익힐 수 있는 걸 거야.


조금 파도를 잡아 탄다는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는 보통 이렇다.


저 파도 저 사람 꺼 아니잖아

아, 오늘 파도 잘 들어오네

딱 내 파도네

백파 맞고 일자로 쭉 가겠네

너무 깨져서 이동하느라 정신없겠어


하하호호 웃는 고수들 앞에서 초짜들은 이런 대화를 나눈다.


저는 허벅지까지만 물이 차도 무서워요

저는 가슴까지는 겨우 참을 수 있어요

라인업 나가보셨어요?

얼떨결에 따라갔다가 죽는 줄 알았어요


그 가운데 서서 양쪽의 대화를 엿듣는 나는 배드민턴의 언어로 해석해본다.


아, 저게 지 볼이 아닌데 저걸 왜 가

야, 여기 구장 좋네. 바닥이 안 울려

오늘 볼 잘 맞는다 

쟤는 앞에 살짝 놓는 걸 참 잘해

저걸 멀리 보내야지 저걸 왜 때리고 앉아있어


라고 고수들은 말한다. 

벤치에 앉아 라켓을 만지작거리는 초심자는 이렇게 말한다. 


라켓 어디 거 써요?

레슨 받아요?

친 지 얼마나 되셨어요?

아직 스매시 못 배웠어요 

어떻게 하면 공이 더 멀리 나갈까요?


바다에 들어가 있으면 그래도 여기 있는 것보단 배드민턴 서브 연습하는 게 훨씬 쉽겠다, 라던지 게임 5번 뛰는 게 라인업 나가는 것보단 훨씬 쉽겠다, 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럼에도 언젠간,


예나야 저 파도 너가 타

언니 그냥 같이 타자


하는 대화를 바다 위에서 나눌 날이 오겠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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