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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민 Nov 22. 2020

비난받아 마땅한 사람은 없다

코로나 2단계 격상 검토 중이란 기사가 뜨기 시작했을 때 가장 먼저 검색한 건 결혼식, 식당, 영화관, 체육시설의 거리두기 지침이었다.


당장 이번 주말 가까운 사람이 식을 올릴 예정이고, 자영업자로 살아가는 지인이 주변에 많다. 12월 초엔 아버지가 만든 영화가 CGV에서 이틀에 걸쳐 상영될 계획이다. 배드민턴 레슨 총무를 맡고 있어 회원들에게 빠르고 정확한 공지를 해야 하는 입장이기도 하다. 스크롤을 내려가며 기사를 확인하는데 영 마음이 편치 않다. 나야 평소 조금 느슨해진 긴장감 다시 붙들어 매고, 약속이야 자동으로 취소될 뿐 필요하면 재택근무하며 지내면 된다. 당장 생계와 관련된 이들에겐 저녁시간 즈음 내려온 속보가 그야말로 날벼락이었을 텐데. 카톡을 주고 받으면서도 도통 어떤 위로를 건네야 할지 몰라 속이 타들어갔다.


1.5단계로 지내는 동안 나는 어떻게 살아왔나. 나나 주변 사람들 가운데 확진자가 나오지 않은 건 천운이라고들 표현하던데, 말 그대로 운일뿐 언제 어떻게 감염돼도 이상하지 않을 환경이었다. 사회생활이란 타인과의 접촉이 불가피한 범주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당연히 집을 제외한 장소, 사무실이나 길거리,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마스크 착용은 필수로 지켰고 클럽이나 노래방, 목욕탕, 사람 많은 장소는 찾지 않았다. 단체회식이나 대규모 술자리는 2월 이후 내 일상에서 자연스레 증발했다. 원체 나의 생활패턴이나 성향이 사람 많은 곳을 기피하는 편이어서다. 그러니 천운이라고는 여긴 들 그래도 각자 조심을 하면 비껴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나 라는 오만하고 억울한 생각도 조금은 올라오는 것이다.


그럼에도 집과 회사만을 일정한 시각에 오가고, 직장에선 혼자 근무했으며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만을 이용했는데도 확진되었다는 어느 60대 남성의 기사를 접하며 잠깐 풀린 긴장감이 무고한 누군가에겐 엄청난 피해로 돌아갈 수 있다는 걸 절감하기도 한다.


언론은 끊임없이 원인을 찾으려 든다. 집회가 원인이고 핼러윈이 원인이고 교회며 다중이용시설이며 결혼식장이며 대규모를 집합시키는 특정 집단만이 사회 악인 것처럼 굴지만, 사실 가장 중요한 건 개인 방역이라는 걸 우린 알고 있다. 확진자 한 명 한 명의 동선이 온 국민의 화두가 됐던 지난 3월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타인과 접촉한 횟수가 0인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 횟수가 1이면 조금은 떳떳하고, 100이면 조금 더 부끄러워해야 한다는 뜻일까, 의문도 가져본다.


청춘이 아까워 홍대에 나왔다는 어느 20대의 발언이 실린 기사에 댓글이 달렸다. 생각해보면 참 억울하단다. 연령대 확진자 수를 보면 20대와 60대가 많다는 거다. 할 수 없이 직장 때문에 밥도 먹고 대중교통도 이용해야 하는 건 3,40대인데도 확진자 수는 가장 적다는 논리였다. 몸가짐을 제대로 하라는 비난과 함께 욕설을 적어놓았길래 댓글 신고하기를 조용히 누르고 나왔다.


출처는 질본


그의 말에 일리가 있긴 했다. 숫자상으론 그래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과연 이런 식의 일반화가 누구를 위한 것일지. 1단계로 재조정됐을 때도 꿋꿋하게 최소한의 외출을 지켜온 20대와 60대는 무슨 죄로 비난을 받아야 하며 소비의 주체층이 3,40대인 이 사회에서 나는 일하느라 어쩔 수 없었다, 는 명분이 얼마나 당신을 떳떳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가. 오죽 원망스러웠으면 저런 글을 적었을까 얼굴 모를 작성자의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지면서도 형언할 수 없는 씁쓸함 또한 몰려온다.


일 년 혹은 수년간 어둠의 터널을 걸어온 친구들은 지난 토요일, 시험장 문턱도 밟아보지 못하고 병실로 들어가야 했다. 직장을 다녀야 해서 어쩔 수 없이 타인과 접촉을 해야 했던 30대와 40대만큼이나 노량진 식당가에서 다닥다닥 붙어 끼니를 해결해야 했던 20대의 간절함도 처연한 건 마찬가지다. 고령자에겐 치명적인 전염병이라 알려졌기에 더욱 몸을 사렸을 60대들이 있다. 눈에 띄게 몰상식한 행동을 해온 일부 사람들은 존재하지만, 그 누구도 저 숫자 하나에 묶여 깡그리 비판받아도 될 만큼 허투루 살지 않았다. 누가 누구를 탓할 수 있단 말인가.


기사 댓글을 보고 살짝 분노가 차올라 적은 글이기도 하지만, 잠시나마 해이해졌던 그간의 나에게 보내는 쓴소리이기도 하다. 온라인을 가득채워가는 짜증섞인 분노와 한계점에 도달한 듯한 혐오감이 폭발하는 건 아닌지 무섭기도 하다. 부디 코로나가 타인을 증오하는 도화선이 되지 않길 간절히 바라본다. 우린 이보다 더한 시절도 잘 견뎌왔던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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