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겐 작은 취미가 있다. 아침에 일어나 명상을 마치고 거실로 들어왔을 때 이루어지는 작업. 그것은 비몽사몽인 채 새벽에 세콤을 해제하러 나오는 그 모습과는 확연히 다르다. 제법 여유를 갖추고 머그컵을 손에 쥔 채 나타난다거나 전날 물을 채워 넣은 요구르트병 따위가 들려있기도 하다.
현관 나무계단에 옹기종기 놓인 채 봄과 여름, 가을의 햇빛을 잔뜩 머금었던 화분들은 겨우내 우리 집 거실 창가 자리에서 지내게 된다. 입동이 좀 지날 무렵, 이제 슬슬 꺼내야 하나 싶어 옷장에서 드라이클리닝 맡겨두었던 패딩을 들여다볼 무렵의 어느 날, 화분 대이동이 이루어진다. 아버지와 엄마가 두꺼운 면장갑을 끼우는 아침이 바로 그날이다.
허리 다치겠다, 내가 할까? 물어도 아유, 됐어! 거절하는 건 도움을 마다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화분이 놓일 자리가 머릿속에 차곡차곡 계산되어있기 때문이라는 걸 안다. 퇴근하고 돌아오면 거실 한구석은 정글이 되어있다. 겨울 햇빛은 아주 이른 시간부터 천천히 스며들듯 마룻바닥을 비추다 사라지고 나는 그 잠깐의 볕을 소파에 뒹굴며 쬐고 있는 것을 좋아한다. 봄이 올 때까지 화분과 동거하는 지금 이 계절이 반가운 까닭이다.
화분들도 반가운 눈치다. 죽어가던 화초들이 몇 살아났다. 이미 죽었다 싶으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아쉬워 마른 흙더미에 계란 껍데기이며 요구르트 찌꺼기를 며칠 쌓아가던 엄마가 어느 날,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살았어!
나사로야 나오자 하니 무덤에 들어간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가 살아 나왔다는 성경의 어느 구절처럼 엄마의 정성이 깃든 작은 취미가 벌써 몇 번째 화초를 살려냈는지 모른다.
꽃잎 하나 늘어갈 때마다 싹이 꿈틀거리며 올라올 때마다 엄마는 환호한다. 환호소리에 힘입은 화초들은 또다시 생명력을 힘껏 뽐내기 시작한다. 이리 좀 와바, 이것 좀 봐봐. 엄마의 손가락이 향한 곳엔 어김없이 새순이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다. 아, 엄마는 나를 이렇게 키웠겠구나. 관심은 꺼져가는 생명도 활활 피어오르게 만드는구나. 아니, 애초부터 생명력이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이상의 힘을 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당연한 일을 참도 오래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