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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민 Jan 24. 2021

"제가 위로해도 될까요?"

암을 앓고 있던 친구의 치료비를 위해 ‘앨리바바와 30인의 친구친구’라는 구독 서비스를 기획했다. 창작자들이 모여 매일 이야기를 발송했다. 황예지 작가도 그중 하나였다. 매달 16일 연재했던 글이 그녀의 책(다정한 세계가 있는 것처럼)의 토대가 되었다. 이도진은 세상을 떠났지만, 친구들은 여전히 모이는 자리마다 이도진의 이름을 부르며 그를 기억한다.


황예지 작가를 팔로우하고 있던 터라 우연히 이도진의 인스타그램을 발견했다. 비록 세상을 떠난 후에야 그를 알게 되었지만, 이제라도 알게 되어 다행이라 여겼다. 그가 찍은 사진,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한 시간, 활자로 옮겨놓은 모든 순간이 찬란했다. 어느 것 하나 값지지 않은 게 없어 하나하나 읽어 내려가다 머리를 한 대 세게 내리 맞은 것 같은 글을 발견해 이곳에 옮겨둔다.


  




말은 입과 입 사이에서 너무나도 가볍게 부유한다. 쟤가 아프대. 쟤가 동성애자래. 쟤가 어쩌구 저쩌구 어쩌구 저쩌구 그렇대. 애저녁에 나는 그런 게 싫어 대부분의 걸 오픈해버린 사람이지만 너무 멀어서 잘 보이지도 않는 사람이 갑자기 나에 대해서 자신의 감상을 더해 주워섬길 때, 그걸 나에게 전달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을 때, 누가 누가 말을 옮겼다고 전달받을 때... 나는 너무나도 큰 무기력감을 느끼고 만다.


부당해고를 당했을 때, 퀴어잡지라서 인쇄를 거부당했을 때, 암환자의 통증에 대해 심인성이라고 판단 당했을 때. 나는 그때마다 타인이 당사자를 완벽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심지어 그게 가족이고 연인일지라도. 사람들은 소설과 영화와 잡담을 통해 간접 경험을 연습하며 공감의 영역을 확장해가지만 한계는 분명 있다. "당해보지 않으면 결코 모른다."라는 식으로 정리하기에는 어딘가 아쉽지만, 저 문장은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오롯이 내 곁에 있었기에 나는 사람을 미워하지 않고 좌절감을 극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힘들고 어려운 것은 어설픔이다. 어설픈 공감의 언어는 대체로 투사를 바탕으로 하며, 상대의 상황과 감정을 수탈한다. 마약성 진통제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이의 귀에 "죽지 마."라고 속삭이게 되는 것이다. 이 경험은 나에게 여전히 상처로 남아있다.


나도 누군가를 위로해야 할 때가 있다. 상황과 조건은 너무나 다양해서 정답이 없기에 여전히 배우는 중이다. 어설플까 두려워 입을 다무는 건 일종의 회피다. 그나마 내가 알게 된 것은 함께 만들 상황에 대해 상대방에게 먼저 묻는 것이 좋다는 거다. "제가 위로해도 될까요?" 라는 식으로. (인스타그램 'LEEDOZIN')






지난날 내 입에서 건너간 위로의 말들은 참도 어설펐다는 걸 이 글을 통해 알게 된다. 어설플까 두려워 입을 다물었던 숱한 날에 소외감을 느꼈을 이들이 있다. 그것을 뻔히 보면서도 나의 입장을 챙기기 바빠 입을 열지 않았다. 생김새가 저마다 다른 것처럼 마음을 주고받는 방식이 다양한 건 너무도 당연한 사실인 것을 난 그 모든 것에 참 가볍게도 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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