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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민 Jan 19. 2021

어쩌다 운이 좋아 지금이 만들어졌다

광화문 거리를 걸었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생명안전시민넷 활동가였다. 불과 10분 전 카페에 앉아 읽던 책에 등장했던 일곱 글자. 생명안전시민넷. 김훈 작가가 공동대표로 있는 그 단체. 세월호 참사를, 지하철 스크린도어에서 사망한 청년을, 건설현장 추락사고를, 나처럼 기사로 접하고 마는 게 아닌 사람들. 실생활로 옮겨와 무언가를 끊임없이 진행하는 사람들이다.


삼십 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환경단체나 시민단체나 참여연대에 발 한 번 들이지 않았다. 과연 이대로 살아도 될까 의문이 들었다. 그럼에도 고작 하는 거라곤 재활용 분리수거, 쓰레기 길거리에 안 버리기, 고기 먹는 횟수 줄이기 정도였다. 그걸로도 충분히 잘하고 있는 거라 자위했다. 날마다 쏟아지는 기사를 보며 안타깝다, 참 안 됐다 느낀다. 그건 정말 어쩌다 내가 그런 상황에 부딪힌 적이 없기 때문이란 걸 안다. 세상은 어쩌다, 벌어지는 일이 많은데 나는 용케도 그 기구한 운명을 요리조리 피해 살아왔을 뿐이다.


단체에 가입한다고 해서 대수도 아니다. 커피 몇 잔, 밥 한 끼 덜 먹으면 충당할 수 있는 금액을 후원이랍시고 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을지도 모른다. 종종 날아드는 메일링을 훑고 이런 일이 벌어졌구나, 또 벌어졌구나, 또, 또... 끝없이 반복되는 재난에 익숙해져 무덤덤해질지도 모른다. 그 무덤덤함을 갖는 순간이 오지 않길 바라며 가입했을 뿐이다.


활동가는 얼굴도 모르는 나에게 생명안전시민넷이 어떤 단체이며 이러한 길을 걸어왔다고 짧지 않은 시간을 구구절절 이야기해주었다. 구구절절이라 적은 것은 초면인 내 앞에 다가온 그의 목소리가 너무나 절박하게 와닿았기 때문이다. 어쩌다 가입하게 되었는지 궁금한 눈치였다. 책 읽다가 가입하게 되었다 하니 단번에 맞춰버린다. 혹시 김훈 작가님 책이요? 나 같은 사람이 적지 않은가 보다 싶어 왠지 마음이 놓인다. 읽던 책을 엎어두고 사이트를 뒤져 회원가입을 누르게 만드는 글의 힘이란. 대체 어떤 힘을 가진 걸까.


나이에 걸맞은 삶이라는 말은 나를 옥죄게 만든다. 20대 때 갖던 감정과는 확실히 다르다. 동시에 좀 더 단정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잡념을 하나씩 가지치기하듯 싹둑 잘라내 준다. 그러니 오늘은 나이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쪽에 무게를 좀 실어봐야겠다. 잘 살아가고 있는지 되돌아도 보고 잠자리에 들어야겠다. 할 일은 많은데 먹고살긴 바쁘고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는 요지경 요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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