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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민 Feb 01. 2021

봄이 오긴 할까

지난해부터 연이 닿은 기업에서 올해도 제안이 들어왔다. 설레는 마음 반, 오늘이 마지막이다 쏟아붓는 마음 반. 50분 동안 혼자 쏟아낼까 봐 시작부터 밑밥을 던졌다. 저는 여러분의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말이 많아질 나이가 됐나 봐요. 꼰대처럼 잔소리하긴 싫은데, 중간중간 질문 던져주세요.


아마 나보다 많은 걸 보고 듣고 생각할 친구들이다. 내가 살아온 시대보다 훨씬 좋은 환경에서 보다 나은 생각을 가졌을 친구들이다. 그래서 늘 강연을 마치면 너무 말을 많이 한 건 아닌가 후회가 밀려온다. 아무 말 안 하고 들어주기만 해도 충분히 잘 할 친구들이니까.




주말 동안 우리 팀이 고군분투해가며 만든 매향리 방송이 나갔다. 매향리는 서울에서 두 시간 걸리는 곳에 위치한 바닷가 마을. 한국 전쟁 당시,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미군의 사격장이 들어선 마을이다. 주민들은 전쟁이 끝나면 포탄 소리도 멈추겠지, 휴전 중이니까 어쩔 수 없는 거겠지, 하루하루 기다려왔다. 아침 아홉 시부터 13시간 동안, 내리 쏟아지는 포탄소리를 들어온 세월이 무려 54년이다.


표적이 됐던 곳은 농섬. 매향리 해안가에서 1.5km 떨어진 무인도다. 왜 주민들이 살고 있는 민가 근처에 사격장을 만들었을까. 해답은 질문 안에 있다. 실전이랑 비슷하게 훈련을 할 수 있으니까. 인근에 주민들이 살고 있으니 훈련으론 최적의 위치가 아니겠냐는 논리다. 나름 '각광받는' 사격장이었던 터라 괌에서 하와이에서 오키나와에서 전투기들이 하루에도 수십대씩 포탄을 싣고 매향리로 날아왔다.


호미 하나만 들고 갯벌에 나가면 먹고살 수 있었던 자원이 풍부한 마을. 국방부에 농지를 잃고, 터전을 잃고, 오폭과 불발탄으로 가족마저 잃어버린 주민들에겐 우울증이 생기기 시작했다. 120 데시벨이 넘는 소음으로 청각장애를 앓게 된 주민들도 적지 않다. 뱃속에서부터 포탄 소리를 듣고 자랐다는 한 주민은 아버지를 잃었다. 어느 날 집에 돌아오니 스스로 목을 매고 세상을 떠나버린 아버지를 보며 그는 마을을 지켜내겠노라 다짐한다.


사격장이 문을 닫은 지 16년이 지났다. 미군은 소리 소문 없이 철수했고, 국방부는 피해는 인정한다만 안보상 어쩔 수 없지 않겠냐, 며 보상에 대한 책임을 회피했다. 갯벌과 야산, 온천지에 박힌 포탄들은 그대로 남았다. 700억이 들고, 4년이 걸린다는 이유다. 매향리에 그 예산을 투자할 순 없었던 모양이다.


주민들은 포탄을 주우러 다니기 시작했다. 경운기를 끌고, 호미를 들고, 10년에 걸쳐 모은 포탄이 마을 한가운데 쌓였다. 정부가 사격장 기지를 철거하겠다고 나섰지만, 주민들이 반대했단다. 역사의 흔적이니 잘 보존해 잊지 않게 만들고 싶다고. 박물관이 세워지고 습지엔 야생동물들이 돌아왔다. 그 무렵 수원 비행장을 매향리 인근으로 이전하겠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5분으로 담기 힘든, 담기 아까운 소재였다. 좀 더 차분하게 주민들이 짊어지고 온 애환을 듣고 싶었다. 세상에 털어놓음으로써 그네들의 한이 조금이나마 풀릴 수 있다면. 한 명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이 방송을 봐준다면. 합리적인 타협점을 찾기 위해 한 발자국 나아갈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한계를 느낀다.


강연은 비록 50분이지만, 나의 컨디션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매향리를 제대로 마무리짓지 못한 상태였기에 마음을 다잡기가 쉽지 않았다. 이것 또한 변명이라면 변명이겠지만, 차라리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좀 더 살아있는 현장의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었으면 좋았겠다, 는 아쉬움이 남는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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