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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민 Feb 03. 2021

한결같은 상냥함

운동 끝나고 내려오는 길에 지인이 정류장까지 태워주기 시작했다. 어차피 집 가는 길이라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버릇될까 봐 매번 걸어갈 생각으로 체육관을 나서는데 꼭 먼저 물어봐준다. 오늘은 눈도 많이 와서 민폐 끼치기 싫었는데 문 앞에서 기다려 준다. 생각보다 눈길 운전이 잰틀 하여 나는 놀란다. 지나가는 길, 부모님 드릴 타코야키 산다며 잠깐 내린 지인은 내 것까지 사들고 차에 탄다. 부모님은 매운 걸 못 드셔서 네가 위에 거 가져가, 하는데 그 집 타코야키는 매운맛이 맛있어서 나는 또 웃는다. 폭설이라 버스가 기어 오는 바람에 다 식어버렸다. 야식 잘 안 먹는데, 꾸역꾸역 다섯 개를 집어 먹었다. 차가운데 이상하게 맛있다.

상암동에서 근무하는 지인은 어쩐 일인지 저번 주부터 커피 한 잔 하자고 연락해왔다. 본의 아니게 나흘 연속 파토를 내고 있다. 어쩌다 점심 약속이 길어지고, 어쩌다 커피 타임이 길어진 탓이다. 업무시간이라 커피 두 잔까지 노닥거리며 마시기엔 좀 찔려서 차일피일 미루게 되었는데 어김없이 연락이 온다. 내일은 꼭 시간을 만들어야겠다.


오늘 오랜 시간을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서, 각자의 역할에 대해서, 왜 여기에 있는지에 대해서. 같이 일하는 언니들은 작가로서의 자존감이 참 높다. 좋은 분들과 일하고 있다는 생각이 새삼 든다. 정말 행복하다. 감사하기도 하고.

하루를 보내는 와중에도 중간중간 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구절이 문득문득 생각났다. 빨리 읽고 싶어서. 책장을 펼쳤을 때 그 세계 속으로 빠져드는 몰입감이 그리웠다. 읽고 있는 책이 마음에 드는 일은 생각보다 흔치 않다. 보통은 읽다 내 스타일이 아님을 느끼고, 도중에 포기하여 훗날을 도모하고, 읽어야 하니까 꾸역꾸역 읽어내는 일이 잦은 편인데 이 책은 참 편하게 읽힌다. 이따금씩 무라카미 하루키의 라디오에서 들었던 그의 음성이 들려오는 느낌마저 든다. 작품만 몇 개 읽어봤지, 소설가로서 그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기회는 잘 없었는데 이번 책은 에세이로서의 역할 그 이상을 다 하고 있다.


매일 아침 식탁엔 말끔하게 새빨간 딸기가 올라온다. 딸기랑 얼린 오디, 바나나와 아몬드를 갈아 마시는 나 때문이다. 오디와 바나나에 비해 딸기는 갈아 넣기까지 손이 많이 간다. 출근 시간을 조금 당겼더니 아침 식사시간이 부족해져서 예전처럼 식탁에 오래 앉아있지 못하는 요즘이다. 그걸 캐치란 엄마가 부엌에 들어오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딸기 씻는 일이다. 정성스럽게 씻어낸 딸기를 먹은 나는 열심히 일할 수밖에 없다. 조금이라도 엇나갈 수가 없다.


매일매일 감사한 것들을 일기장에 적어놓는 게 올해 목표인데, 오늘은 적다 보니 마음이 따땃해져 오길래 브런치로 옮겼다. 나 혼자 떠들고, 움직이고, 먹고, 일하며 보낸 하루 같지만 사실은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 건네주는 마음에 얹혀 시간을 보내온 셈이다. 늘 받은 걸 곱씹다 보면 나는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었나 생각해보는 편인데, 영 끄집어낼 기억이 없어 부끄럽기도 하지만. 내일 아침 제설작업을 좀 더 열심히 하는 걸로 합리화시켜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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