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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민 Feb 19. 2021

마지막에 대한 예의

이 코너를 처음 봤던 순간을 기억한다. 지나가다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그냥 지나치자니 아쉬워 선 채로 한참을 보다 옆에 있던 의자를 끌어와 앉아서 보았다. 그만큼 재미있었다. 화면 속 배를 탄 기자가 무어라 외치고 있었다. 그 배가 뭔지는 몰라도 재밌고 심각해 보여 빠져들었다. 웅장한 음악이 깔리는 뉴스 프로그램. 잊을만하면 등장해 이것저것 보여주는 기자. 저런 구어체를 뉴스에서 쓸 수 있을까, 저런 자세로 스탠드업이 가능해? 모든 편견을 깨고 등장했던 그 기자는 장장 6분 동안 영상을 이끌어갔다. 저런 코너는 누가 만드는 걸까. 저런 코너에서 일하는 작가는 베테랑인가 보다. 나도 저런 거 만들고 싶다. 막연하게 중얼거렸던 기억이 있다.


한 달 후 어느 주말이었다. 전화가 울렸다. 기동팀 캡이었다.

-응, 쉬는데 미안해. 잠깐 통화 가능하니?

-네, 선배

-부장이 한 달 정도만 다른 팀에 갈 수 있겠냐고 하네. 어때?


꿈이 이렇게 빨리 이루어질 수 있을까. 알겠다고 덤덤하게 대답하면서도 동동 뛰는 두 발을 주체하지 못했다. 비록 한 달이지만, 가고 싶었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왜 나를 불렀지.


-응, 그게... 그놈이 하도 작가랑 싸워서 말이지. 다들 그만둔다고 하나 봐. 그래서 보도국 내 작가가 가면 어떨까, 하시더라고. 그놈도 그걸 원하고.


여기서 그놈이라 하면 한 달 전 화면 속에 등장해 배를 타던 그놈이었다. 한참 연차가 높은 선배였다. 취재력이 끝내준다던 선배. 하지만 조금 성질이 괴팍하다던 선배. 언젠가 저 선배도 축구 잘해? 동료한테 물었을 때 "응, 취재하듯이 해."라는 말을 듣고 주변 모두가 빵 터졌던 박장대소의 주인공. 그는 한 번 물면 절대 놓지 않는다는 점에서 곧잘 충견에 비유되었다. 배울 점이 많아 보였다. 그와 함께 일한다는 건 꽤나 기대가 되는 부분이었다.


그렇게 그와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근무가 아니라 생활이라고 말한 데엔 이유가 있다. 일주일에 네 번. 6분짜리 코너를 만들기 위해 거짓말 좀 보태서 두 달 동안 쉰 기억이 하루도 없다. 아침에 눈을 뜨면 선배로부터 카톡이 와있었고, 잠들기 직전까지 하루의 통화목록은 선배 이름으로 채워졌다. 이런 말을 적어도 될지 모르겠지만, 화장실에 가려고 자리를 비우면 어디야?라는 카톡이 오기도 했다. 악의는 없는 순수한 궁금증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방송원고라곤 써본 적 없는 내 인생에 촬영 구성안이라는 다섯 글자가 등장하면서 나는 팔자 없는 대디 걸(daddy girl)이 되었다. 전직 다큐멘터리 프로듀서였던 아버지에게 매일 밤 구성안을 컨펌받았다. 어떤 그림을 찍어야 하고, 어떤 내레이션이 어울릴지. 어떤 구성을 해야 재미가 있을지. 어떤 장면을 이 6분짜리 영상의 한 방으로 가져갈지. 그저 다른 작가 선배가 쓴 원고를 따라 쓰는 수준이었지만 매일 밤을 지새웠고, 새벽 다섯 시쯤 거실 컴퓨터 바탕화면에 구성안 파일을 저장해두었다. 아버지가 일어나 새벽 여섯 시 정도에 원고를 검토하고 오케이가 떨어지면 팀원들이 있는 전체 카톡방에 올렸다. 아버지가 딱히 구성안에 손을 댔던 건 아니다. 보기에 영 이상한 점이 있으면 한 두 마디 조언을 던져주는 수준이었지만, 내겐 꽤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고, 그 생활을 3년 가까이했다.


그 사이 기자는 두 명에서 세 명으로 늘어나고 또다시 두 명이 나가고 새로운 두 명이 들어왔다. 부장은 세 번 바뀌었다. 작가도 두 번 바뀌었다. 모든 게 다 바뀐 것 같았지만, 업무강도는 예전보다 딱히 나아지지 않았다. 문제는 그게 당연한 건 줄 알았고, 사실 나는 꽤나 그 생활을 즐겼다는 점이다.


그렇다. 나는 이 코너에 있는 동안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즐거웠다. 수화기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가며 선배와 싸웠던 적이 있고, 팀원 사이에 오해가 생겨 새벽 네시까지 술을 먹고 숙직실에서 잠을 잤던 날도 있지만. 월급 인상이 잘 되지 않아 이 길에 들어선 걸 후회했던 밤도 있었지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아이템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남몰래 촬영하는 현장에 찾아가 내 원고가 어떻게 살려지고 어떻게 내쳐지는지 두 눈으로 확인할 때. 긴 통화 속 취재원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하며 점차 안정을 되찾는 걸 체감했을 때. 한 번 맺어진 취재원과 두고두고 안부를 묻는 사이가 됐을 때. 우리가 취재했던 부분이 개선되어 누군가가 조금은 편한 환경에서 일할 수 있게 됐을 때. 이따금씩 고민해서 쓴 클로징 멘트가 방송을 타고 나가던 순간.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그림이 그려지지 않아 퇴근하고 찾아갔던 현장. 거기서 쭈그리고 앉아있던 사람이 그토록 우리가 찾아 헤매던 취재원이라는 걸 알았던 순간. 그 모든 순간이 희열이었다.


소소하고 또 소소하지만, 내겐 거룩한 작업이었고 이 모든 기억은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가 있었다. 회사 내 시상인 주간 베스트나 포털사이트에서 몇십만 뷰가 나온다거나 회사 로고가 적힌 명함을 누군가에게 내민다거나. 뭐 그런 보이는 것들과는 비교도 안 되게 소중한 순간들이었다.  


참 고맙게도 함께 일했던 기자들은 하나같이 색깔이 뚜렷했고, 마음이 고왔고, 정이 많았고, 동세대를 살아가는 비슷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월급도 낮고, 일하면서 겪는 애로사항이야 있었지만, 사람 좋은 것만큼은 여기만 한 곳이 없다, 자부하고 지냈다. 늘 그게 가장 큰 자랑거리였던 것 같다.


한 달은 1년이, 1년은 6년이 되었다. 그리고 느닷없이 찾아온 소식. 2015년 개편 이후로 일주일에 네 번씩 꼬박 나갔던 코너를 두 번으로 줄인다는 날벼락이 떨어졌다. 그럴 수 있다. 리더는 결정을 내릴 권한이 있고, 직원들에겐 그 결정을 따라야 하는 의무가 있으니까. 조금 놀랍긴 했어도 받아들이기 힘들진 않았다. 약간의 이동이 생겼다. 횟수가 줄어드는 만큼 감내해야 하는 부분이었다. 나 역시 이동하게 되었다. 오래 있었던 만큼 나름의 변화가 필요하다 생각해 이동하겠다고 자처한 것도 나였다. 그것까진 좋았다.


그래도 수고했다, 는 말 한마디는 들을 수 있을 줄 알았다. 내가 아니라, 우리 팀원들에게. 이 바닥이 원래 기약 없고 불투명한 데다 잘 나가면 정상, 못하면 시궁창인 생태계라 한들. 꾸역꾸역 그 긴 시간, 책임감 가지고 고군분투해온 사람들이 있다. 열심히 했고, 그만큼의 결과를 만들었다. 그러니까 그냥 마음에 없더라도. 야, 너네 진짜 그동안 수고했다. 근데 상황이 좀 이렇게 돼서 줄여야 될 것 같다. 미안하지만 그렇게 됐다. 이 세 마디를 듣는 일이 이리도 힘든 것인가.


안다. 방송 바닥에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는 것도. 이보다 훨씬 말도 안 되는 일이 많았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다는 것도. 프로그램 없어져서 무산돼서 하루아침에 해고당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도. 워낙 기동성이 좋고, 유동성이 잦은 세계인만큼 언제 어디서 어떻게든 빠르게 적응하는 게 프로의 자세라는 것도 안다. 그렇다면 나는 아직 아마추어인가 보다. 시작은 창대했으나 끝이 미약해져 버린 이 결말이 못내 아쉽다. 비정상 속에서 덜 비정상인 걸로 만족해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까 마음이 허락하는 순간까지 아쉬워하련다. 아쉬움을 다 털어내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새로이 맡은 업무가 온 세상, 내 세상인 것처럼 잘 해낼 것이다.


어딘가에서 본 후로 잊히지 않는 그 문장을 기억한다.

- 우리는 없던 길도 만들지


닷페이스에서 만들어낸 온라인 퀴어 프로젝트 슬로건이다. 알아주지 않는다면 내가 알릴 것이고, 주눅 들지 않을 것이고, 당당하게 개척해나가겠다는 마인드. 나는 그 마인드를 참 좋아한다. 언제나 그래 왔듯 앞으로 그럴 것이라 자위하는 오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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