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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민 Feb 20. 2021

람보르기니와 사진 40장

"어디서 볼까? 너 먹고 싶은 거 골라. 람보르기니 끌고 나갈게. 너 태워주고 사진도 찍어주게."


오랜만에 보기로 한 약속을 앞두고 친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마지막 문장에 살짝 의문을 품었지만 무슨 뜻인지 묻지 않았다. 먹고 싶은 메뉴나 정해보자 싶어 포털사이트를 뒤적거렸다. 보광동에 우설 파는 가게가 있다. 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곳이라 여기! 라고 추천하자 친구가 말한다.


"아, 근데 거기 주차가 되나? 이게 아무 데나 주차는 안 되거든. 아니면 차 두고 다른 거 끌고 나갈까? 네가 잘 생각해봐."


뭘 생각해야 할지 몰랐으나 일단 고민을 해봤다. 친구는 오랫동안 염원해온 차를 샀고, 샀으니 나에게 보여주고 싶은 걸 텐데. 나는 친구와 만나 맛있는 걸 먹고 보광동의 골목길을 걷고 싶었다. 주차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만나자며 차를 두고 오라 했다. 친구는 못내 아쉬워하며 람보르기니를 마다하는 애는 네가 처음이라며 웃었다. 람보르기니가 나의 것이 되는 것도 아닌데, 뭘 마다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말할 뻔했다. 말로는 알겠다며 차를 두고 갈 테니 맛있는 우설을 먹자고 하는 애가 말끝마다 드라이브를 시켜주고 싶었다고 되뇐다. 아, 나는 드라이브를 좋아하지 않는다. 걷는 걸 좋아한다. 차를 사지 않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차에 익숙해져 걷는 걸 귀찮게 여길 순간을 조금 미루고 싶은 것도 있다. 이쯤 되니 내가 너무 친구의 소망을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구나 새삼 민망함이 몰려온다. 몸은 편하지만 마음은 불편한 승차감과 다리는 아프지만, 마음은 편한 자유로움. 결국 내가 졌다. 그래, 끌고 나와. 구경이나 하자. 말해버렸다.


주말이었다. 보광동은 한적했다. 먼저 도착할 것 같으니 가게에 들어가 있겠다고 하자, 친구가 다급하게 말린다.


-드라이브 먼저 해야지. 이거 뚜껑 열어야 되는데, 밤 되면 춥잖아.


이태원에서 뚜껑을 연 람보르기니를 몬다. 그 조수석에 내가 앉아있다. 상상하니 오금이 저렸다. 곧 죽어도 그건 못하겠다 싶어 배고프다고 징징거리기 시작했다. 아침밖에 안 먹었다. 너랑 일찍 만날 것 같아서 점심 건너뛰었다. 너무 배고파 쓰러질 것 같다, 하니 친구로부터 승낙이 떨어졌다. 그래? 그럼 밥부터 먹자.


했으나 나를 카페에서 주운 친구는 조수석에 앉히자마자 강변북로를 달리기 시작했고, 속도를 내기 시작했고 (난 과속 공포증이 있다), 망토를 두른 브루스 웨인으로 빙의되더니 버튼을 몇 개 조작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망할 뚜껑이 열려버렸다. 옆 차선을 오가는 차량들의 시선을 살짝 의식하는 듯한 친구에게 "오늘 미세먼지 최고 나쁘대" 라며 언질을 주었으나 개의치 않는 그녀. 최대한 돌려 말하기 위해 "이런 차로 서울을 달리는 건 아깝다, 저기 어디 해안도로 달리면 기분이 나겠네" 하니 멀리 가는 건 좋아하지 않는다던 그녀. 뚜껑을 열어도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리지 않는 건 이 차량 내 공기 순환이 잘 되고 있다는 뜻이란다. 오픈카를 탔던 영화 속 주인공들의 머리카락이 정신없이 나부끼는 걸 상상하며 그렇구나, 라는 말을 뱉어냈다. 그리고 차량 데시벨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저기 친구야, 내가 이렇게 속도 80인 도로에서 120 달리면서 소음 내는 차량들 고발하는 프로그램을 하고 있어, 라는 말을 건네진 못했다. 사람들은 차를 사면 이런 소리를 내고 싶어 하는구나. 개중엔 나처럼 원치 않아도 조수석에 타고 있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구나. 싸잡아 손가락질하는 건 안 해야겠다, 생각하며 소음을 감내하니 친구가 웃는다.


"빠르게 달리면 애들은 무서워하던데. 넌 괜찮지?"

"아니, 나 손에 식은땀 났어."


영 반응이 시원치 않자 친구는 소음을 없앴고, 뚜껑을 닫기 시작했다. 이쯤 되니 또 미안해진다. 국내에 서른몇 대밖에 없다는 차라고 하는데 그에 걸맞은 리액션이 도무지 나오지 않는다. 아마도 내가 그 세계를 몰라서 일 것 같다. 차를 직접 사보고, 천차만별인 가격대 앞에서 람보르기니는 하늘의 별따기라는 걸 체감하며 좌절도 한 번쯤은 해봐야 그 값어치가 와 닿을 텐데. 이게 실물이야? 대박. 진심 어린 호들갑이 나올 텐데, 안타깝게도 도통 차에 관심이 없다. 동물이 그려진 건 비싼 차, 라는 감각이 내가 가진 전부다. 풀옵션이라며 내부 재질이 다르다는데, 옵션이 없으면 뭐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모르니 맞장구를 칠 수도 없다. 그나마 차내 가죽이 빨간색이었고, 나는 빨간색을 좋아한다. 이거다, 싶어 집중 공략했다. 빨간색이 예쁘다는 말을 온갖 언어로 표현하니 그제야 친구는 뿌듯해한다. 그렇지? 예쁘지?


흐뭇하게 웃는 친구를 보며 내 그릇이 작음을 반성한다. 좀 더 추켜세워줄 수 있는 건데. 와, 너 진짜 성공했구나. 사업 잘 되는구나. 집 한 채를 몰고 다니네. 그녀의 텐션에 맞춘 리액션을 할 수도 있을 법 한데, 아마도 빈 말을 못 한다는 건 핑계고 내 마음이 조금 꼬여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마음을 고쳐먹고 물개 박수를 쳐보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웬 걸. 사진을 찍으러 가야 한단다. 사진? 되물으니 코스가 있단다. 의문을 품었던 마지막 문장이 현실화되는 순간이었다. 그간 태웠던 애들이 사진 찍고 좋아하더란다. 잠깐 고민했으나 따라가 보기로 했다.


예쁜 담벼락이 있는 경사로에 차를 세운 그녀는 얼른 운전석으로 오라며 내 휴대폰을 들고 차에서 내린다.


"자, 이제부터 아주 천천히 움직이면서 운전석에 타봐."


람보르기니 모델 정도나 되면 폼나게 타보겠는데, 이건 좀 이야기가 다르다. 남의 집 앞에서 비상등 켜놓고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지나가는 사람들도 다 쳐다본다. 쟤네 뭐하는 거지. 왜 사진을 찍지. 말하지 않아도 들리는 목소리에 반응한 내가 고개를 숙이니 친구는 또 다급해진다.


"아, 고개 들어. 다시 다시. 이쪽 봐야지."


그렇게 40장가량의 사진이 나의 휴대폰에 저장됐다. 누구한테 보여줄 수도 없고, 밤마다 들여다볼 것 같지도 않은 사진들. 한 발 내리고, 다시 한 발 올리고, 차 문을 열었다가 다시 닫으며 온갖 각도로 찍은 사진들은 아직도 내 휴대폰에 잠들어있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운전석으로 돌아온 친구는 이제 메뉴를 고민한다. 보광동의 우설 집은 주차가 어려울 거라며 주차장을 찾기 시작했다. 몇 군데, 분명 저 멀리서 오라이 오라이 손짓하던 관리자들이 가까이 갈수록 엑스표를 그리며 우리가 탄 차는 거부당하기 일쑤였고, 결국 강남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우설을 먹고 싶어 했으니, 곱창은 어때? 오발탄 가자. 오발탄이 주차가 잘 돼.


그렇게 보광동은 서초동이 되고, 우설은 양대창이 되었다. 환한 미소로 반겨주며 구석에 비워둔 자리를 안내하던 관리인. 만족스러운 듯 주차를 시켜놓고 나와 양대창과 곱창을 5인분이나 먹어치운 우리. 돌아오는 길, 한강공원에 들러 아메리카노를 마실 때야 마음이 편안해졌던 기억이 있다.


이것은 나의 람보르기니 체험기냐? 아니다. 친구가 한강에서 했던 말이 있다. 사실은 그 말을 기록하기 위해 자학에 가까운 서론을 늘어놨지만 말이다.


"나는 항상 구체적으로 내가 원하는 삶을 그려왔던 것 같아. 20대 후반부터 밴틀리를 타야겠다고 생각했어. 막연하지만 구체적으로 생각했어. 그냥 비싼 차를 타고 싶다는 게 아니라 그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 겠다고 생각했어. 어정쩡하게 할 거면 안 사. 무조건 최고여야 돼. 그래서 벼르고 벼르다가 이제 사게 된 거야, 이 차를. 근데 신기한 게 뭔 줄 알아? 사업을 하다 보니까 성공한 사업가들을 많이 만나잖아. 공통점이 있더라고. 매일 명상하는 시간을 가져. 그리고 원하는 삶이 구체적이야. 그런 구체적인 상상들이 결국은 현재를 만들어냈더라고."


친구는 20대 초반부터 사업을 시작했고 20대 후반에 폭삭 망했었다. 말 그대로 폭삭. 그리고 3,4년 전부터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 다시 일어난 친구는 이전보다 훨씬 강해졌고, 유연해졌고, 시야가 넓어진 사람이 되어있었다. 내가 아는 사람 가운데 가장 수완이 좋은 사람. 가장 일을 잘 해내는 사람. 사업 쪽으로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 고등학교 시절부터 봐왔지만, 지금 그녀가 누리는 모든 건 지난날 그녀가 수없이 도전하고 실패한 끝에 만들어낸 노력의 산물이다.


그때 알았다. 친구가 내게서 보고 싶어 했던 모습이 어떤 모습이었을지를. 나는 람보르기니에, 주차장에서 받아주지 않는 차를 타며 불편함을 감수하는 것에, 폭주족 같은 소음으로 따가운 시선을 받는 것에, 집착하느라 친구의 성공을 축하할 기회를 놓쳤던 것이다. 좀 더 같이 즐길 수 있는 것을. 두 팔 벌려 안아주며 고생했다, 말할 수 있는 것을.


그래서 다짐하게 된다. 그 친구와 내가 걷는 길은 다르지만, 언제든 친구가 원하는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을 만큼 마음에 여유가 생기기를. 그날의 마무리도 한강의 야경을 보면서 마시는 아메리카노 한 잔이 되기를.


[요가저널 코리아 '마음아, 안녕?' 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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