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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민 Mar 02. 2021

비오는 날 국수 한그릇

타인을 마주하는 법

"아니, 근데 왜 비 오는 날 혼자 온 거야. 궁상맞게..." 


고기국수를 한 접시 내어주고 주인장 아저씨가 묻는다. 한 번 얼굴을 보면 어떤 인상인지 각인되곤 하는데, 글을 쓰는 지금 그 주인장 얼굴은 기억은 남지 않는다. 웃는 듯 웃지 않는데, 웃지 않는 듯 희미하게 웃고 있던 눈매. 많고 많은 맛집 리스트를 다 제쳐두고 이곳을 찾아왔건만 거 참 서운하게 말씀하시네, 싶다가도 그 관심이 싫지 않다. 


제주 청수리에 왔다. 급하게 결정하게 된 터라 티켓 한 장만 끊어놓고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하였다. 편도가 만 원이라서일까 비행기는 만석이었다. 이 많은 사람들이 평일에 제주도를 이렇게나 많이 온다는 사실에 놀라며 자리를 찾아 앉는다. 14B. 창밖을 보기도 화장실을 가기도 애매한 가운데 자리. 양 옆엔 하필 남성 두 명이 앉았는데 왼쪽에 앉은 남성은 체격이 작지 않아 꽤 답답해 보였다. 기상악화로 차례차례 지연되고 결항되는 와중에도 내가 고른 항공사는 꿋꿋하게 버텨 살아남았고 승객을 싣고 상공으로 솟았다. 비바람이 몰아쳐 김포에서 제주까지 한 시간 반이나 걸린 건 좀 예상외였지만. 


제주를 참 많이도 왔는데 언제나 목적이 분명했다. 수학여행, 아버지의 출장 동행, 가족여행. 혼자 왔던 건 한라산 등반을 계획했던 2박 3일의 여정이 전부였다. 그러니 제주 동쪽에 무엇이 있는지 서쪽이랑은 무엇이 다른가 알 리가 없었다. 올레길이 유명하다고 하니 뚜벅이로 다닐만한 가보다 싶었다. 식당이 네 시에 닿고, 버스가 40분에 한 대 온다는 건 몰랐다. 차로 가면 10분인 거리가 도보로 가면 한 시간 반이나 걸린다는 것도. 


도착한 제주에도 비는 내리고 있었다. 뭔들 어떠리. 강풍이 몰아쳐도 휴가니 좋고 제주니까 좋다. 넉넉한 마음으로 예약한 청수리 숙소를 찾았다. 제주에서 황금색 개와 살고 있는 여자 사람입니다, 라는 소개글과 단아한 주택에 반해 6일 내내 머무를 곳으로 정했다. 호스트는 공방을 운영하는 모양이었다. 오늘은 문을 닫는 날인데, 수업이 있어 잠깐 열어두었다며 장화를 신고 뛰쳐나와 나를 반겨준다. 이곳은 외곽이라서 밤에는 어둡고 무서워요. 가로등이 없거든요. 공항에서 청수리에 오는 동안 거리거리에서 주워 들었던 이야기를 호스트로부터 다시 한번 듣는다. 정말, 어둡고 무서운가 보다. 


김포에서 먹은 육개장이 전부인지라 저녁을 해결해야 했다. 숙소에서 도보 28분 거리에 편의점이 하나, 그 길 따라 흑돼지구이, 전복 피자, 주꾸미 삼겹살, 카페, 파스타... 식당들이 즐비하다. 어쩐지 카키색 야상점퍼를 입고 흙이 묻어 더러워진 운동화를 신은 채 들어가고 싶은 곳은 아니라 망설여졌다. 식당에 다녀오는 사이 편의점이 문을 닫아버리면 곤란하니 몇 시까지 여는지 확인하려던 찰나 고기국수, 순댓국, 닭곰탕, 돔배 고기, 라는 투박한 글씨들이 세로로 적힌 작은 입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편의점 건물 뒤편으로 작은 국숫집이 있었다. 지방 소도시에 가면 가게 통유리에 대문짝만 하게 음식의 사진과 이름을 붙여놓는 가게들이 많다. 그런 곳, 열에 아홉은 맛있었다. 경험의 확률에 모험 삼아 들어가 보기로 했다. 


테이블 여섯 개 남짓한 식당이었다. 주인장이 꼭꼭 숨었는지 보이지 않아 주방까지 걸어 들어가니 그제야 모습을 드러내던 남성. 60대 초반 정도 되었을까 싶은 주인장은 식사가 되냐는 말에 무뚝뚝한 대답을 내놓는다. "되죠." 


다행이었다. 윤기 나게 반짝거리는 테이블에서 누군가 구워주는 고기가 먹고 싶은 그런 날이 아니었다. 조금 젖어 찝찝하기도 한 옷가지의 축축함을 견디면서도 호호 불어 먹는 고기국수가 먹고 싶은 날이었다. 입구 쪽에 자리를 잡고 앉으니 주인장이 찬 몇 개를 내온다. 생양파랑 고추 두어 개, 김치와 깍두기. 단출하게도 네 개뿐인데 고기국수가 나오기도 전에 조각난 생양파를 먹어치웠다. 맛있어요, 더 주세요, 하고 손님이 부리는 응석을 호탕하게 받아줄 것 같진 않아 주신 거나 다 먹자는 심산으로 야금야금 집어먹기 시작했다. 갈증이 나기도 하고, 식당 바깥 유리에 부딪히는 빗소리가 괜히 기분 좋아 막걸리를 들고 왔다. 알아서 가져간다 하니 뒤도 안 돌아보고 그러세요, 한다. 그 너무나도 명확하고 쿨한 거리감에 웃음이 절로 나온다. 비가 오는 날은 그런 간격이 달갑다. 


고기국수 한 사바리를 보물단지 모시듯 양 손으로 감 싸들고 호로록 마셔대니 주인장이 저쪽 주방에서 나를 힐끔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그때 한 말이었다. 


"아니, 근데 왜 비 오는 날 혼자 온 거야. 궁상맞게..." 


마지막 네 글자가 귀에 살짝 거슬렸지만 딱히 저항할만한 몰골은 아니다. 비가 오니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 싶어 웃어 보이니 제주에 오늘 왔냐고 묻던 주인장. 내내 날씨가 좋다가 하필 이번 주만 내내 비바람이 몰아치는 일기예보이다 보니 마주치는 사람마다 딱하다는 표정이던데, 주인장도 크게 다르지 않다. 휴가를 온 거구나. 맛있게 드쇼. 쿨하게 사라졌다. 


나 말고 손님도 없다 보니 주인장도 딱히 할 일이 없는 눈치다. 이것저것 닦다가 주방 조리도구를 뒤적뒤적거리다가 다시 홀로 나와 나를 한 번 쳐다보고 휴대폰을 들여다본다. 들릴 듯 말 듯 헛기침 소리가 한 번 내더니 주방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노래가 흘러나왔다. 김현식의 노래, 유재하의 노래, 김광석의 노래. 


단언컨대 비가 내리고 음악이 흐른 날은 많았지만, 그래서 김현식의 노래를 찾아 틀었던 적도 많았지만 이런 감성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 고기국수 위에 올려진 돔배 고기가 살코기, 비겟덩어리 고루고루 붙은 놈으로다가 촘촘하게 놓아준 그의 섬세함. 비 오는 날 궁상맞게 국수를 먹으러 혼자 찾은 손님에게 하필 저 노래를 틀어 궁상 한 스푼 더 얹어주는 섬세함. 수없이 찾았던 제주도에서 또 하나의 새로운 기억을 간직한다. 그 고기국수 맛을 나는 잊지 못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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