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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민 Mar 13. 2021

시급 1000엔짜리 아르바이트

면접을 마친 선배가 서류 한 뭉치를 들고 들어온다. 손에 쥐고 있던 종이들은 내 책상 앞에 놓였다. 


- 새로 들어올 인턴들 이력서래, 한 번 읽어봐봐.

- 스펙이 엄청나네요. 다들 부지런하게 사는구나. 

- 그렇지? 해를 거듭할 수록 뛰어난 친구들이 들어오고 있어. 


한식조리기능사, 시나리오 번역가 자격증, 토플 110점, OO시 도시재생 서포터즈 10기, 국제기구 서포터즈 수료증... 인간이 가진 저 작은 머리에 이 많은 걸 집어넣을 수 있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슬로베니아에서 반 년간 체류를 했다는 친구는 이 모든 경험을 살려 선배님들과 함께할 수 있다면 원이 없다, 고 써놨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내가 가진 건 달랑 자기소개서와 학위증명서였다. 그마저도 석사가 방송작가를 한다고? 한 달도 못 버틸 걸..., 이라고 생각했다는 어느 선배의 후일담을 고려하면 학위증명서는 걸림돌이었던 듯 싶다. 일본에서는 고깃집에서 아르바이트한 경험이 입사할 때 꽤 유리하게 작용한다는 말을 친구로부터 들은 적이 있었다. 여타 아르바이트에 비해 유독 힘든 업종이란 인식이 강하다 보니 인내, 끈기, 열정을 대변해주는 이력으로 작용하는 모양이었다. 같이 일했던 그 친구가 면접에서 야키니쿠집 썰을 풀어내고 일류 대기업에 입사하는 걸 보며 언젠간 내가 쓸 자기소개서에도 고깃집 이력을 써먹어야지 스치듯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사실상 급하게 결정한 귀국한 터라 준비된 게 아무것도 없었다. 자기소개서를 써야 하는데, 회사에서 일한 경험은 잡지사 편집, 기획팀에서 반년씩 1년 일한 게 전부인 인생이었다. 돌아보니 일본에서 오래 공부를 하긴 했는데 딱히 뭘 공부한 건지 애매한 상황 속에 가장 쓸만한 건 역시나 고깃집 에피소드였다.


딱히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었던 건 아니다. 한국식 야키니쿠지만, 손님의 대부분은 일본 사람들이었고 그들에게 나만의 레시피를 홍보하는 게 매출로 이어지는 걸 보며 보람을 느꼈다, 는 게 내용의 전부였다. 게장을 시키는 손님에게 남은 밥을 달라해서 껍데기에 넣고 비비면 스고이- (멋지다!) 라는 찬사가 돌아왔고, 김가루 솔솔 뿌려 마무리를 해주었더니 오이시소- (맛있겠다!) 라는 환호성이 터졌다던가. 소고기는 부위마다 식감이 천차만별이라 '가장 추천하는 고기는 뭐예요?'라는 질문에 가장 곤란해했다던가. 대부분은 가게에서 가장 비싼 메뉴를 추천하는데 나는 '오늘 기분이 어떠세요?'라고 물었다는 것. 축하할 일이 있다면 기분 낼 겸 두툼하게 썰려 나오는 스페셜 우설 세트를 권했고, 기름진 부위를 좋아한다면 꼭 느끼함을 잡아줄 생자몽사와를 같이 추천했다는 것. 비빔밥을 시킨 손님에게는 국물 한 숟갈 넣고 비벼야 찰지게 비벼진다는 걸 설명했다는 것. 보도국에 취재를 하러 들어왔다는 애가 게 껍데기에 밥 비벼먹는 소리를 하고 있었으니 아마도 선배는 살다 살다 별 지원자를 다 보겠네..., 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때는 여름이었다. 대학 3학년 여름방학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캐나다에서 어학연수를 마치고 돌아와 2학기를 앞두고 있던 때였다. 주변 친구들이 아르바이트를 하나둘 그만둘 무렵 나는 일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신입생 때, 친구따라 강남가듯 따라시작한 아르바이트였다. 그래야 '있어 보이는' 대학생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어학연수를 간 사이 오코노미야키집은 문을 닫았다. 중년의 재일교포 부부가 하던 낡은 집이었다. 기차역 철교 아래 월세를 내고 지내던 부부에겐 딸이 셋 있었다. 유화, 도화, 미화. 일본어로 바꿔부를 수 있으니 편하다면서도 언젠간 보여주었던 외국인등록증엔 정직한 글씨체로 카타카나가 써있었다. 이름까지 바꾸는 건 아마도 용납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는 마치다라는 작은 소도시로 도쿄 끄트머리에 붙어있는 마을이었다. 남쪽의 시부야라고 불릴 만큼 대형 백화점이 즐비했고 유동인구가 많았다. 요코하마선과 오다큐선, 두 개의 노선이 교차하는 지점이라 역 근처는 늘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마치다 동쪽 출구는 암흑의 거리라 불렸다. 야쿠자가 자주 출몰하니 밤에는 조심하라는 소리를 수도 없이 들었다. 어둑어둑해지면 가게 앞마다 새카만 정장을 빼입은 삐끼들이 나와 서 있었다. 캬바쿠라(젊은 아가씨들과 대화하며 술 마시는 유흥업소)로 유인하기 위함인데, 그네들끼리는 매일 보는 사이라 친근한 듯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담배를 뻑뻑 피워대는 풍경, 지나가는 행인들 위아래로 훑으며 외모평가를 하고 있는 듯한 풍경이 유일한 기억인 그런 거리였다. 


아침부터 열었던 식당들이 하나 둘 문을 닫고 밤 가게들은 하나 둘 불을 켜갈 무렵 동네에 살면서 단 한 번도 걸어 들어가 본 적 없는 그 골목을 그날따라 지나가게 된 것이었다. 눈 앞에 안내문 하나가 떡하니 붙어있었다. 시급 1000엔 아르바이트 홀 서빙 모집. 입이 떡 벌어졌다. 당시 도쿄 기본시급은 850엔. 편의점도 식당도 카페도 술집도 900엔을 못 넘어갔다. 1000엔은 편의점 야간 금액. 1100엔을 넘어가려면 이자카야 새벽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이곳은 10시 이후부터 1100엔을 준다고 쓰여있다. 간판을 보니 야키니쿠집이었다. 가게 앞을 기웃거리며 안을 들여다보니 곱게 단장한 여자애들이 방긋방긋 웃으며 열심히 화로를 나르고 있었다. 머리에 흰 수건을 두르고 송골송골 맺힌 땀을 뚝뚝 떨어뜨리며 목에 핏대세워 이랏샤이마세- 를 외치는 그런 드라마에서 보던 야키니쿠집이 아니었다. 여자아이들이 많다는 건 일이 고되지 않은 곳이라는 방증이기도 했기에 전화번호를 서둘러 옮겨적고 거리를 빠져나왔다.


042-722-XXXX


세 번 신호가 가고 얇은 허스키톤의 남성이 전화를 받았다. 


-전화 주셔서 감사합니다. 와규본점 LEE가 전화받았습니다. 

-안녕하세요, 아르바이트 공고 보고 전화드렸는데요.


일본어가 조금 서투른 데다 이름도 낯설다. 억양으로 보아 한국사람은 아닌 것 같고 중국인 유학생인 듯 싶은데 대뜸 이름과 나이를 묻더니 당장 내일 오란다. 다음날, 약속한 시간에 찾아갔다. 아르바이트생으로 보이는 여자애가 3층으로 안내해준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빈 테이블 위에 유니폼과 재떨이가 널브러져있다. 불은 반쯤 켜져 창가로 들어오는 볕이 닿는 부분만 반짝이고 있었다. 유난히 곱슬거리는 갈색머리, 검은색 뿔테 안경을 쓴 남성이 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앉아있다. 얼굴은 조막만한데 눈도 코도 입도 조막만해서 곧 소멸할 것 같은 인상이다. 내게 앉으라는 손짓을 하더니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갑을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유학생인가봐요? 한국?

-네.


보일듯 말듯 코웃음을 치고는 희미하게 웃는다. 


-나도 한국에서 왔어. 

-그런데 왜 일본어로 하세요?

-여긴 일본이잖아. 다른 친구들이 못알아들으니 오해할 수도 있겠지. 

-네. 생각 못했네요. 

-비자는 언제까지 있니?

-내년 가을까지 있어요. 


운이 좋은 편이었다. 졸업식 날짜에 걸맞춰 일주일 길게는 한 달까지 비자 날짜를 맞춰주는 편인데, 간혹 일주일도 못받는 경우들이 있었다. 졸업식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귀국할 짐을 꾸리며 며칠 보내다 예고 없이 찾아오는 경찰 손에 붙들려 유치장에 갇혀있었다는 이야기를 유학생들로부터 간혹 들었다. 불법체류자가 워낙 많은 탓이겠지만, 참으로 비인간적이라 생각하며 비자 신청을 할 때 한 달은 나와주길 얼마나 빌었는지 모른다. 입국관리소에서 큰 실수를 한 것인지 기간을 애매하게 앞두고 신청해서였는지 모르겠으나 8개월이나 넉넉하게 나왔다. 학생 비자가 있으면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다. 학교에 다니지 않아도 일을 할 수 있다는 걸 공식적으로 허락해준 셈이니 사실상 내게는 득이었다. 


-많이 남았네. 내년이 졸업이라며. 

-네. 졸업하고 대학원에 갈 거라 어차피 일은 계속 할 생각입니다. 

-그래, 일본어 잘하네. 고깃집 일은 처음이지?

-네.


담배 한 대를 꺼내 피우던 그가 연기를 훅 뱉어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린다. 말없니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는 재떨이에 꽁초를 비벼 끄고 말했다. 


-다음 주부터 나오자. 잘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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