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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민 Mar 14. 2021

쿠마 씨 옆자리 누가 앉을래

아르바이트를 졸업한다는 건

만화 '원피스'의 현실판이 있다면 그건 우리일 거라 생각했다. 어딘가 모자란듯 부족해보인 사람들이 똘똘 뭉쳐서 해적을 무찔러야 했으니까. 여기서 해적은 손님이었다. 좋은 손님도 나쁜 손님도 그들이 머물다 가는 테이블 하나하나가 우리에겐 무찔러야 하는 전쟁터였다. 


점장은 이 작은 가게를 야키니쿠계의 일류점포로 만들겠다는 포부가 거대했다. 원피스 포스터를 보면 가장 맨앞에 등장하는 루피를 닮았다. 프랑스 인형이 살아 움직인다면 저런 모습이었을 거야,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리 생각했던 코리시는 눈코입이 예쁘장한 얼굴이었다. 거구라는 이유로 힘쓰는 일마다 불려 다녔다. 맨날 나만 시키고 그래, 이런 건 남자들이 좀 하지, 툴툴 대면서도 그 작은 입술을 앙 물고 무거운 숯상자도 번쩍번쩍 들어올리던 그녀였다. 코니시는 나를 비롯한 또래들보다 세 살이 많았다. 항해사 나미처럼 점장과 투톱을 달리며 가게 안 살림을 두루두루 해내곤 했다. 일본말이 서투른 점장을 어르고 달래며 알맞은 발음과 단어를 가르쳤다. 발음을 고치라는 핀잔을 몇 번 듣다못해 민망함이 터져나오면 점장은 코시니를 향해 외쳤다. "이 돼지야!" 코니시는 눈을 가볍게 흘기면서도 코웃음치고 돌아설뿐 별다른 내색을 않는 사람이었다. 


사장은 점장의 형이었다. 였다. 둘 다 장신이었지만 동생과는 달리 형은 까무잡잡한 피부에 탄탄하고 매끈한 피부였다. 에노시마에서 종종 서핑을 즐긴다던 그는 종종 애인을 데리고 소리없이 2층으로 올라와 나를 놀라게 했다. 군더더기 없이 할 말만 딱 내뱉는 건 일본어가 짧기 때문이리라 생각했다. 필요 없이 사람에게 말을 붙이는 성격이 아니었다. 자기 가게에서 일하는 직원이면 이것 저것 물어볼 법도 한데, 그는 도통 사람이랑 말하는 데 관심을 두지 않는 듯 했다. 맥주 한 잔이랑 특선 갈비 1인분 줄래? 가 끝이었다. 마주앉은 애인과도 많은 말을 주고 받지 않았다. 그는 원피스의 조로였다. 결과적으로 열 군데가 넘는 체인점을 냈으니 세계 최고 검사가 되겠다는 조로만큼이나 야심이 컸던 셈이었다. 예쁜 여자를 보면 한없이 살가워지는 주방장 쿠마 씨는 해적선에 상주하는 요리사 상디였다. 나머지는 보직자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졸개들. 나를 포함한 아홉 명의 아르바이트생들은 거의 그들에게 키워지다시피 했다. 


쿠마 씨는 젊은 시절 아사쿠사의 한 야키니쿠 가게에서 치프로 지냈던 유능한 인재라고 했다. 이름만 들어도 아는 그곳은 도쿄에 가장 먼저 생겨 야키니쿠계의 정석이라 일컬어지는 곳이었다. 단가가 높고 고객 서비스가 뛰어나 늘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어느 날 군대를 갓 제대한 한국인 청년이 주방 보조로 들어왔다. 새카만 피부에 깡마른 놈이 눈에 독기를 잔뜩 품고 들어와서는..., 훗날 쿠마 씨가 회상한 사장은 그랬다고 한다.


야키니쿠 주방 문화는 상당히 엄격해보였다. 요리를 배우러 들어가도 바로 칼을 잡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가장 먼저 설거지를 시작한다. 대형 식기세척기가 손에 익을 무렵 파를 썰거나 양파를 다듬는 재료 손질이 맡겨진다. 이따금씩 고기에 얹혀나가는 꽃 모양 당근을 칼질하기도 했다. 어디 원산지의 고기를 어떻게 취급하는지, 어떤 방향으로 고기를 잘라내야 하는지, 생인지 냉동인지. 고기의 세계는 나름 규칙과 전통이 있어보였다. 접시에 담을 때도 그냥 덩어리를 잘라 뭉텅뭉텅 얹어놓는 게 아니었다. 한 점 한 점 화로에 올려 구워 먹는 문화라 그런지, 데코레이션에도 상당히 신경을 쓰는 눈치였다. 나오는 고기 한 접시만 봐도 이 가게 수준을 파악할 수 있다는 고기 마니아들도 손님 중엔 많았다.


주방 보조로 들어온 사람들이 고기 자르는 칼을 손에 쥐기까지 꽤나 오랜 시간을 요했다. 군대를 갓 전역한 한국인 아르바이트생이 결국 고기를 잘랐는지, 자질구레한 업무만 도맡아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일한 지 10년째 되던 해에 가게를 그만두며 쿠마 씨에게 동업을 제안했다고 한다. 검은털 와규A5급 팔아봅시다, 제가 한국에 있는 동생을 불러서 점장을 시킬 테니 쿠마 씨는 치프가 되어주십시오. 제발 저와 함께 해주세요. 아마도 청년은 나름 성실하고 능력도 갖췄으며 야망 또한 있어보였나 보다. 결국 쿠마 씨는 한국인 청년과 동업관계를 맺게 된다. 그렇게 둘이서 가게를 차렸다.


내가 들어간 건 가게가 문을 연 지 반년 정도 지난 시점이었다. 아르바이트생은 대부분이 내 또래였다. 가게에 들어가 가장 먼저 대화를 나눴던 건 쿠보라는 이름의 동갑내기 여자아이였다. 얼굴도 동글동글, 눈도 똥글똥글한 그녀는 정감이 가는 포근한 미소를 지닌 사람이었다. 학부 수의학 전공자로 한국어에 능통한 친구였다. 한류 붐이 일었을 때부터 한국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고, 한국인 남자 친구를 사귀게 되면서 한국어 과외까지 받고 있다던 그녀. 마까나이(아르바이트생들에게 제공되는 식사)를 먹는데 김치와 단무지를 보고 진수성찬이네! 라며 뿌듯하게 단무지를 씹는다던가. 누군가의 농담에 소리 내어 웃는 나에게 포복절도하지마, 라며 어깨를 토닥인다던가. 이번 주에 과제가 많아 아르바이트를 많이 못했다고 실토하니 그런 건 고진감래, 라며 말을 건네는 식이었는데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 것 같으면서도 딱히 받아칠 수 없었던 특유의 화법을 그녀는 한동안 즐겨 사용했다.


두 달에 한 번 정도 날을 잡고 전체 회식을 가졌다. 목적은 친목도모로 1차 회식장소는 볼링장이었다. 서너 명씩 팀을 나눠 고득점을 달성한 팀에게 상금이 수여된다. 두당 만 엔씩 돌아갔으니 꽤나 쏠쏠한 금액이었다. 한껏 기분이 좋아진 채 이자카야를 찾아들어가 노미호다이(일정 금액을 내고 정해진 시간 동안 무제한으로 술을 마시는 것)로 거나하게 취한 뒤 가게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고 해산하는 식이었다.


술자리를 가질 때마다 우리들 사이에선 작은 눈치게임이 시작됐다. 화두는 누가 주방장 옆자리에 앉을 것인가, 였다. 주방장은 술고래였다. 그런 그의 옆자리에 앉으면 지치지 않고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능수능란함과 잔이 비지 않게 끊임없이 술잔을 지켜봐야하는 인내를 요했다.


일본 술 문화에서 첨잔은 미덕이다. 같이 마시는 사람은 상대방의 잔이 비지 않게 계속 채워야 하는 것이 예의였다. 우리나라에서 잔에 조금 남은 술을 두고 '어허이 어디 밑잔을 깔아'라는 말이 있다는 건 그들에겐 딴세상 이야기였다. 잔을 다 비울 때까지 술을 따르지 않으면 아주 취한 상태이거나 눈치가 없는 사람 취급을 받곤 했다.


아르바이트생은 여자아이들이 많았다. 주방장 주변에 둘러 앉아 진상 손님 흉도 보고, 짓궂은 점장의 장난을 고자질하기도 했다. 고기에 일가견이 있는 쿠마 씨의 설교를 듣기도 했고, 연애 이야기로 수다 꽃을 피우기도 했지만, 쿠보는 달랐다. 그녀는 쿠마 씨 옆에 앉는 걸 극도로 꺼려했다. 언젠가 넌지시 물어봤을 때 고개를 대차게 저으며 불편하고 힘들다며 토로해왔다. 사실상 거의 아버지뻘이었고, 쿠마 씨 본인도 우리에게 술을 따르라 강요한 적은 없었으나 연배가 있는 남성 옆자리에 앉아 젊은 여성으로서 술을 따르는 행위 자체에 거부감을 가졌던 것 같다. 재미없는 대화에 맞장구를 쳐야 할 때도 있었고, 주방 사람들끼리 시비가 붙어 고성이 오가기라도 하면 말려야 했다. 화법이 거친 사람들이었기에 짓궂은 농담도 오갔다. 그런 상황들이 쿠보에겐 버거웠던 모양이었다. 어느 날은 절대로 다시는, 쿠마 씨 옆에 앉지 않겠다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날 이후 우리는 쿠보와 쿠마 씨를 멀찌감치 떨어뜨려놓았다.  


점장은 스물아홉 살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도 당시 그는 어른스러웠고 능수능란했고 호불호가 확실하되 싫은 감정을 절대 드러내지 않는 대인배였다. 베테랑이었던 코니시는 쿠마 씨를 간단하게 제압할 포스를 갖춘 인물이었다. 런치타임을 담당했던 사오리는 쿠마 씨를 어르고 달래는 데 익숙해진 소녀였다. 아마도 쿠마 씨가 좋아하는 여자 연예인을 닮았기 때문일 거라고 우린 추측했다. 쿠마 씨를 아버지, 하고 따르는 치히로는 우리 가운데 가장 술을 잘 마셨고, 여배우처럼 예쁘장한 아야노는 백치미였기에 쿠마 씨를 힘겨워하지 않았다. 다들 나름의 방법으로 자리를 지켰고, 나는 그들과 쿠보의 가운데 그 언저리쯤에서 홀짝홀짝 술을 마시곤 했다.


그랬던 쿠보가 아르바이트를 졸업한다며 가졌던 술자리에서 보란 듯이 쿠마 씨 옆자리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잔이 빌 틈 없이 꼬박꼬박 술을 채워 넣었다. 짓궂은 농담을 건네오면 수줍은 목소리로 쿡쿡 웃으며 쿠마 씨의 팔짱을 자연스럽게 끼곤했다. 취기에서 나온 행동은 아니었다. 쿠보는 어느 때보다 정신이 멀쩡했고, 눈빛이 살아있었다. 두 옥타브 정도는 올라간듯한 하이톤의 목소리로 쿠마 씨의 목소리에 화음을 얹곤 했다. 멀찌감치 그 모습을 바라보던 코니시는 눈가가 벌게져있었다. 


- 저 지지배, 이젠 진짜 어른이 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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