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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민 Mar 18. 2021

녹차 아이스크림 시키신 분?

오래전 매일 맡았던 그 냄새가 생각난다. 그럴 때마다 코끝이 시큰거린다. 허기가 지거나 고기가 먹고 싶어서는 아니고, 다신 못 맡을 줄 알았던 냄새라 반가워서다. 아르바이트 끝나고 유니폼을 벗을 때마다 훅 풍겨오던 냄새. 옷에 코를 대고 숨을 깊게 들이마시면 폐구멍 저 아래서부터 차오르는 것 같던 배부른 냄새. 고깃집 특유의, 숯불에서 나는 건지 화로 위에서 연기를 빨아들이는 환풍구에서 나는 건지는 아직도 밝혀내지 못했지만 묘하게 매력적인 향이다. 음식 냄새가 옷에 배는 걸 지독하게 싫어하는데 유일하게 킁킁거리며 맡는 그리운 냄새다.


아르바이트하던 시절엔 라커에서 나는 그 찌든 내가 싫었다. 유니폼은 매일 집에 가져서 다우니로 빨래를 했고 여분이 되면 상의는 한 벌 더 받아놓고 번갈아 입었다. 라커 안에 방향제나 놔두거나 탈취 스프레이를 뿌려대는 건 기본, 한 번은 향수를 뿌렸다가 손님한테 클레임을 받은 적도 있었다.


클레임 하니까 생각나는 일화 가운데 하나. 내놓는 요리야 돈을 받고 팔지만, 맛이 있는 건 기본이고 가게 분위기는 사실상 접객이 좌우했다. 공항이나 이자카야, 철판 요릿집,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개인적으로 고깃집 접객 서비스가 가장 힘들었고 가장 성향에 잘 맞기도 했다. 공항은 인공지능에 가까운 수준을 요했고, 이자카야는 취객이 너무나 많았으며 철판 요릿집은 직접 구워줘야 해서 손이 많이 갔다. 편의점은 접객이랄 건 없었고, 다방면에서 능수능란해야 했으니 골치 아픈 일이 잦았다. 고깃집의 경우 조금 달랐다. 다른 가게들과는 달리 고깃집은 단골층이 확실하게 존재했다. 매번 주문하는 고기를 찾고, 마시는 술을 늘 마시던 방식으로 주문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한국식이었으니까 쇠젓가락이 나갔는데, 나무젓가락만을 고집하는 사람은 꼭 외워둬야 했다. 다음에 왔을 때 생뚱맞게 쇠젓가락을 내밀면 '나를 기억 못 하냐'는 뚱한 얼굴로 '와리바시(나무젓가락)'을 요구했다. 본인이 좋아하는 자리에만 앉으려고 하는 손님들도 꽤 많았다. 가장 인기 있는 자리는 2층 창가 자리였다. 밤거리를 내려다볼 수 있고, 칸막이가 설치된 다른 테이블과는 달리 탁 트인 시야를 자랑하는 통유리가 한몫 했던 것 같다.


좋아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메뉴를 즐기러 오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고기를 대접하는 입장에서도 즐거울 수밖에 없었다. 맛있는 거 먹고 찡그리는 사람은 없으니까. 기분이 좋은 상태에서 오니까. 일단 무조건 사과부터 하라는 암묵적인 일본 문화가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곳이 접객의 장(場)이다. 사람이 붐벼 요리가 조금 늦게 나와도 웬만큼 피해가 가는 게 아닌 이상은 이해하고 넘어가 주었다. 무조건 첫마디는 "정말 죄송합니다만..." 으로 시작했다.


그럼에도 기억에 남는 손님이 몇 있다. 단가가 비싼 가게이다 보니 지갑이 두꺼운 손님들이 꽤나 찾아오는 편이었는데 비즈니스나 가족, 연인 단위를 제외한 부류, 불륜커플은 좀 까다로운 편이었다. 대체로 불륜 당사자 남성은 동행한 여성한테 잘 보이고 싶어 했다. 가족이나 친구 사이면 금액을 보고 한 단계 낮춰 주문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 반면 불륜커플은 절대적으로 가장 좋은 고기, 가장 비싼 부위, 혹은 여성이 먹고 싶어 하는 메뉴를 모조리 주문하는 식이었다.


때는 평일 저녁이었다. 손님이 별로 없는 편이라 아르바이트생들이 돌아가며 식사시간을 가졌다. 1층부터 3층까지 테이블에 대여섯 개씩 있는 작지 않은 가게였으므로 하루를 마감하는 작업은 꽤 오랜 시간을 요했다. 양념장을 채워 넣고 음료를 발주하고 화로를 깨끗하게 정리하는 자질구레한 일들. 나는 2층에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슬렁슬렁 청소를 하고 있었다. 몇 번 본 적 있는 불륜 커플이 등장했다. 기혼자인 남성과 주점에서 일하는 여성이었다. 근처에 단란주점이 있다 보니 종종 남성 손님들이 2차로 (그곳에 있는 여성들과) 고기를 먹으러 오는 경우가 있었다.


손님이 테이블에 앉으면 가장 먼저 물수건이 나간다. 물수건은 동글동글하게 말려있는데, 김이 모락모락 나는 상태임을 보여주기 위해 양손으로 살살 돌려 펼친 다음 손님 앞에 갖다 댄다. 그럼 손님은 자연스럽게 한쪽 손을 내밀고 종업원은 그 위에 물수건을 살짝 얹어주는 식이다.


물수건을 건네주면서 음료를 묻는다. 생맥주면 가게에 비치된 맥주 종류를 말해주고 우롱하이(사케에 우롱차를 섞은 것) 면 알코올이 진한 게 좋은지 적당한 게 좋은지 묻는다. 생맥주와 우롱하이는 첫 잔으로 많이들 주문하던 대표 메뉴다. 음료가 나갈 때쯤이면 보통 주문할 메뉴가 정해져 있다. 고기가 포함된 메뉴면 화로에 숯을 채워 테이블에 올려둔다. 곧이어 한 사람당 하나씩 양념장을 담은 그릇이 나간다. 특제간장소스와 레몬즙, 소금장을 담은 3단용 그릇인데 이 손님과의 마찰의 발단도 이 양념장 그릇이었다.


그릇을 놓는 과정에서 특제소스가 한 방울 튀었던 모양이다. 하필 바로 옆에 놓여있던 남성의 휴대폰이 놓여있었다. 너무 작은 방울인데다 휴대폰 색깔도 어두워 바로 알아보지 못했는데, 요리가 테이블에 하나씩 나갈 때마다 나를 째려보는 남성의 눈초리가 느껴졌다.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것 같기는 한데, 뭐가 문제인지 전혀 파악하지 못한 상황 속에서 그들은 우설을 굽고, 갈비를 굽고, 안창살까지 배불리 먹은 다음 돌솥비빔밥까지 야무지게 해치웠다. 그 사이 2층엔 다른 손님들이 들어왔고 나를 도와주러 올라온 아르바이트생이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는지 슬쩍 물어왔다. 무슨 일 있었어? 너 저 테이블 가지 마, 내가 갈게.


느낌이 쎄했다. 한 번도 손님과 얼굴을 붉힌 적이 없었던 때였다. 지나다니며 커플 둘의 대화를 주워듣다가 나로 인해 휴대폰에 국물이 튀었다는 알게 됐다. 아차 싶어 물수건을 가져갔다. 혹시 튀었었냐. 미안하다. 휴대폰은 괜찮냐. 물수건 더 원하냐. 라는 말을 최대한 공손하게 건넸다. 여성이 말없이 웃으며 남성을 쳐다보니 남성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우며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러냐며. 살짝 튄 거라 괜찮다며 손사래를 친다. 그래서 정말 다 괜찮은 줄 알았다.


둘이 후식을 주문했다. 고기의 느끼함을 깔끔하게 잡아줄 녹차 아이스크림과 바닐라 아이스크림. 그 사이 2층에 있던 손님은 죄다 돌아가고, 나를 도우러 올라왔던 아르바이트생은 저녁을 먹고 오겠다며 3층으로 올라갔다. 주방에서 엘리베이터가 올라왔고 아이스크림을 꺼내는 사이 손님인 여성은 화장실에 갔다. 홀에 나가니 테이블이 남성이 덩그러니 혼자 앉아있다. 녹차 아이스크림은 남성의 것이었다. 여성은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주문했으나 자리에 없었으므로 주인 없는 빈자리에 놓아두었다. 다짜고짜 남성이 고성을 내기 시작했다.


-넌 왜 누가 녹차 아이스크림인지 안 물어보는 거야?

-네?

-누가 녹차를 시켰고, 누가 바닐라를 시켰는지 물어봐야 될 거 아니야.


그렇다. 모든 요리가 나갈 때마다 마법의 주문이라도 외우듯 요리 이름을 허공에 날려 보낸다. 우설이 나오면 '이것은 우설입니다'라는 코멘트를 붙이고 굽는 방법이나 양념장 같은 부연설명이 있으면 꼭 읊어야 하는 게 룰이다. 음료도 마찬가지다. 맥주 시키신 분? 하고 주문자가 손을 들게 만들어 본인 앞에 놓아주어야 한다. 그게 올바른 접객이다. 그러나 이 상황은 조금 다르지 않은가. 아이스크림 주문을 내가 받았고, 녹차는 남성 바닐라는 여성임을 뻔히 아는데. 더군다나 여성이 화장실에 가있는 상태에서 홀로 남은 남성에게 쎄쎄쎄라도 하듯 마주 보고 녹차는 어느 분일까요? 바닐라는 누가 시키셨을까요? 물어본다는 게. 더 농락당하는 기분일 텐데.


남성의 표정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졌다. 울그락불그락 했다. 곧 터지는 게 아닐까 싶은 남성의 분노한 얼굴을 보는데 나도 화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이게 이렇게까지 화를 낼 인가. 그랬으면 안 됐는데, 아이스크림을 다시 쟁반에 담았다. 마치 1분 전 일은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듯 밝게 웃으며 "녹차 아이스크림 시키신 분! 아, 손님이신가요? 예. 그럼 바닐라 아이스크림은..."라고 여성의 자리에 놓으려고 한 순간 남성은 폭발했고 날이 선 목소리로 당장 점장을 불러오라고 속삭였다. 나의 능글맞은 태도가 화를 북돋았던 것이다.


아차, 싶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 또 내가 곤란해진다. 순둥순둥 해서 일본어도 서투른 점장이 내가 한 일 때문에 손님한테 사과를 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그런데 어쩌겠나. 화가 난 손님들은 꼭 윗사람을 불러오라고 한다. 보직자로부터 사과를 받아야 성에 차는 모양이다. 놀란 점장이 달려왔다. 인터폰으로 대충 사정을 들어서인지 오자마자 손님을 달랜다. 기분 나쁘셨냐, 죄송하다. 제가 교육을 잘 시키겠다. 허나 좀처럼 그의 분노를 가라앉을 줄 몰랐고 급기야 핸드폰을 집어던지기 시작했다. 양념장이 묻었다며. 물어내라며.


바닥에 떨궈진 휴대폰을 집어 든 점장은 또 물수건을 가져와 휴대폰을 닦아가며 손님에게 머리를 조아렸고, 3층에서 난동 피우는 소리를 들은 아르바이트생들이 내려와 나를 구석으로 데려갔다. 저 사람 '진상'이야. 신경 쓰지 말고 피해있어. 뭐 저딴 새끼가 다 있어. 그리고 참다못한 한 친구가 손님과 싸우기 시작했다. "얘가 뭘 그렇게 잘못한 겁니까? 휴대폰 멀쩡한데 왜 가게에 와서 소란이십니까?" 그의 도발로 2층은 다시 고성이 오가는 난장판이 되었다.


손님이 돌아가고 난 뒤 점장은 희미하게 웃는 얼굴로 신경 쓰지 말라며 되려 나를 달랜다. 흥분한 아르바이트생에겐 다음엔 그렇게 나서지 않아도 내가 알아서 할게, 라며 다독여준다. 매니저와 베테랑 아르바이트생들은 다음부턴 바꿔줄 테니 그런 일이 있으면 꼭 바로 말하란다. 그렇게 그날의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음식값은 받지 않았고 그날 이후 오지 않았다.


내가 배운 건? 돌아이를 돌아이처럼 응수하면 안 된다는 걸 배웠다. 보여도 안 보이는 척, 들어도 안 들리는 척, 성을 내면 내나 보다 흘려들을 줄도 알아야 한다는 걸 체감했다. 내가 하지 않으면 내 선배가, 윗사람이 머리를 조아려야 할 수도 있다는 것. 화난 손님을 대하는 일보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는 게 더 힘들다는 것. 정답은 없겠지만 말이다. 대하기 까다로운 손님일수록 아군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마인드는 이제 세월이 지났으니 드는 생각일 거다. 지금은 아쉬운 소리를 하는 게 하나도 아쉽지 않은데 그때는 뭐가 그렇게 억울하고, 자존심을 부렸는지 모르겠다. 눈 딱 감으면 다 지나가는 것을.


좋은 경험을 하게 해준 손님이었다. 그날 이후로 임의로 요리를 테이블에 내려놓은 일은 싹 사라졌다. 조금 더 뻔뻔하게 웃고, 사과하는 방법을 배웠다. 녹차 아이스크림 덕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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