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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민 Mar 18. 2021

무릎을 꿇어라

손님을 대하는 방법

가게에 처음 일하러 간 날 나를 가장 놀라게 했던 신문물이 있다. 이름하여 핸디(HANDY). 주문받을 때 쓰는 기계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내가 대학 3학년이 되기까지 해 본 아르바이트라곤 고구마 장사와 베스O라빈스, 철판 요릿집과 편의점, 이자카야가 전부였다. 성인이 되면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해보고 싶다는 야무진(?) 꿈이 있었고, 말 그대로 '다양한' 일을 해보는 게 목적이었기에 짧게는 한 달, 길게는 일 년이 전부였던 나의 경력. 고구마야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고구마 사세요, 두 손 모아 외치면 웬만한 분들은 다 사주셨다. 그야 한겨울에 교복 치마 입은 애들이 쪼르르 서서 군고구마 헐값에 몽땅 드리겠다는데 호기심에라도 기웃할 법 했다. 우린 김치도 얹어 팔았으니까. 야자 하러 학교로 돌아가는 선생님이 보이면 우사인 볼트 빙의돼서 달려갔다. 선생님은 추우니 얼른 들어가라며 남은 고구마들을 탈탈 털어 싸들고 사라지셨다. 그 시절의 인심이란, 낡은 군고구마 통에 남은 고구마 껍질까지 싹쓸이해주고 싶은 그런 것.


베스O라빈스는 아르바이트라도 하면 민트 초코를 배불리 먹을  있을까 싶어 시작했던 아르바이트였다. 수능 끝나고 잠깐. 방학이 시작되고 연극 활동을 해야 했기에 2 하고 그만두었지만 인심 좋은 여자 사장님은 일급을 두둑이 챙겼다며 졸업을 축하한다 했다. 하루에 꼴랑 두세 시간 했던 일이라 봉투가 두둑하진 않았다. 편의점은 주문을 받을 필요가 없었으니 패스. 철판 요릿집과 이자카야는 손으로 적는 식이었다. 철판 요릿집은 오코노미야키를 파는 가게였는데 메인 요리보다 새우나 치즈, 파와 같은 토핑류가  많았기에 손으로 적는  빨랐고 이자카야는 제주도 출신의 일가족이 건너와 차린 한국 요릿집이었는데 주방 이모가 일본어를 못했다. 한국식 이자카야라는 간판을 내건 동네 유일한 한국 술집. 참이슬을  병에 12000이나 받고 팔았음에도 유학생들이  묻은  모아 꾸역꾸역 마시러 오는 곳이기도 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핸디에 대한 이야기. 야키니쿠가게에 들어갔을  손바닥만  작고 하얀 기계를 건네받았다. 앞으로 3 동안  이걸 외워야 . 언뜻 복잡해 보이는데, 익숙해지면 간단해. 기계를 쥐어주며 점장이 말했다. 가만 보니 아르바이트생들은 저마다 앞치마에  기계를 하나씩 넣어두고 있었다. 손님이 부르면 하이! 하고 달려가 재빨리 기계를 꺼내들고 삑삑- 하는 기계음을 내며 뚜껑을  소리나게 닫는 모습이 어찌나 멋있어 보이던지. 기계의 작은 화면엔 음료, 소고기, 돼지고기, 요리, 디저트카테고리별로 나누어져 있었다. 기억해야   하나였다. 고기를 소금으로 나가냐, 양념으로 나가는지를 체크하는 . 양념은 기본이라 체크를 안 하고 소금만 별도로 체크를 하는데, 초반 며칠은 양념, 양념, 양념, 죄다 체크했다. 민만했는데, 원래 처음 들어오는 애들이 자주 저지르는 실수라 했다.


다른 친구들이 주문받는  가만히 지켜보는데,  신기하다. 손님이 부르면 재빠르게 달려가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는다. 메뉴를 여쭙겠습니다, 라는 멘트를 날리며 핸디를 연다. 이때 손님들 대부분시선이 메뉴에 향해있다. 갈비 3인분이랑 냉면 하나랑 김치 모둠이랑 일단 그렇게 . 하고 메뉴를 덮은  일행들과   기세로 음료잔을 쥐어든다.  타이밍에 아르바이트생은 주문 확인을 해야 한다. 주문하신 내용을 확인해드리겠습니다, 라는 멘트와 함께. 앵무새처럼 손님이 말한 내용을 그대로 읊조린다. 갈비 3인분이랑 냉면 하나, 김치 모둠. 이상으로 괜찮으시겠습니까? 턱을 괴고 우리가 말하는 내용을 곰곰이 들으며 같이 확인해주는 손님이 있는가 하면 그러거나 말거나 대충 끄덕끄덕 하며 빨리 사라져 주길 바라는 손님들도 있다.


핸디에서 조작된 주문은 주방으로 넘어간다. 쿠마 씨가  고기를 자르는 위치에서 뒤를 돌아보면 손이 닿는 곳에 기계가 놓여있었다. 갈비와 냉면, 김치 모둠엄지손가락만 종이에 인쇄된  일정한 기계음과 등장한다. 종이는 쉽게 뜯을 수 있도록 반쯤 잘려져 나온다. 쿠마 씨는 갈비가 적힌 종이만 뜯어내 본인 앞 찬장에 자석으로 붙여둔다. 요리 옆에 서있는 서브 요리사에게, 김치 모둠은 설거지를 하는 주방 막내에게 건넨다. 준비된 요리는 종이와 함께 등장한다.   테이블 인분인지 확인하기 위해 음식이 담긴 접시에 살짝 얹어놓는 식이다. 이따금씩 주방이나 홀에서 헷갈려 다른 테이블로 나가는 경우도 있다. 대부분은 아르바이트생이 실수를 인지하고 손님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재빨리 주방으로 달려가 부족한 양을 조달한다. 쿠마 씨가 귀여워하는 아르바이트생이 실수를 하면 대부분은 허허 어 넘겼지만, 덩치 큰 사내아이가 범인이면 눈에 힘을 주고 째려보며 '또 실수하기만 해봐'라며 겁을 주었다.


주문을 받을  무릎을 꿇는  테이블에 앉은 손님을 올려다보기 위함이었다. 반대로 손님은 내려다보는 위치다. 메뉴판을 보며 갈비가  일분, 곱창이  인분 하는데 아르바이트생이 서있으면 고개를 바짝 올려 목소리를 크게 내야 하니 손님 입장에선 주문하기 수월한 구도였지 싶다. 메뉴를 들여다보다가 이건 뭐냐,  중에 추천하는  무엇이냐, 물어보는 경우도 았는데 우리가 앉아있으면 메뉴를 같이 들여다보기 편했으니 서로가 윈윈하는 자세였다.


손님이 부르면 달려가 무릎을 꿇고 핸디를 치는 모습. 모든 주문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매번 테이블 앞에 눈이 닿을랑 말랑한 위치로 시선이 내려갈 때마다  나라가 일본임을 실감했다. 종종 한국인손님으로 오거나 외국인 유학생이 아르바이트로 오면 무릎을 왜 꿇어야 하냐며 의아해했다. 장시간 일하다 보면  잠깐 앉을  있는 찰나의 시간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고 둘러댔다. 주문 조금  많이 해주었으면 조금만  천천히 말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든다고. 사람에 따라 해석하기 나름이겠지만, 나는 내 무릎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다. 따라야 했으니 따른 것이기도 했지만 가게가 바쁜 와중에도 당신의 주문이 최우선이라는 걸 보여줄 수 있는 몸짓이었기에 그 놀이를 즐겨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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