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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민 Apr 11. 2021

꼰대가 된다 한들

지난해부터 대학생 대상으로 온라인 강연을 하고 있다. 브런치에 나이나 직업, 사람 관계에 대한 글을 올렸는데 어느 날 메일 한 통이 날아 들어왔다. 여성의 커리어나 여성으로 사는 삶, 가족에 관한 이야기 가운데 가장 자신 있는 내용으로 강연을 해달라는 제안이었다. 흔쾌히 받아들였다. 잊을 만하면 요청이 들어와 끊길 듯 끊이지 않고 해온 지 이제 1년이 되어간다.  

    

여성으로서의 커리어를 논한다는 건 딱히 자신 있는 분야가 아니었다. 결혼하지도 않았을뿐더러 육아와 일을 병행하지도, 일시적인 경력단절을 경험해본 적도 없다. 직장에서 여성이라 차별받거나 대우받았던 기억도 없다. 내가 무딘 탓일 수도 있겠지만, 없는 기억을 쥐어 짜낼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고작 몇 년 앞서 사회에 나왔다는 이유로 연사가 되다니. 사실상 내가 건넬 수 있는 건 괜찮다, 다 괜찮다. 당신은 이미 완벽한 존재니까 그 매력을 어떻게 어필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보자, 는 메시지뿐이었다.      


나만의 강점을 가진다는 것, 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주제를 잡고 강연을 시작했다. 나는 04학번 그들은 20학번. 강산이 한 번 바뀌고도 또다시 바뀔락 말락 할 시간이다. 우리 사이에는 어떤 공백이 존재하는 걸까. 엄연히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나 때는 이랬어요, 라는 말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회사에 들어오는 인턴들을 소재 삼았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반짝반짝 빛나는 나이에 어두컴컴한 사무실에서 자리를 지키는 그들. 어떨 때 눈치를 보고, 어떤 말을 건네는지, 어떻게 적응을 해나가는지 관찰하는 버릇이 생겼다. 100명이 넘는 인턴 친구들을 보며 대단한 걸 깨달은 건 아니다. 스펙이나 학벌보다 중요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 처음엔 모든 일에 서툴던 친구가 실수를 반복하고 여러 번 지적을 받으면서 놀라운 속도로 성장해나갔다는 것. 그 비결은 꾸준함과 적극성이었다는 것. 결과적으로 본인이 원하는 언론사에 합격했다는 것. 또래 친구들의 이야기라 그런가 강연을 듣는 학생들도 꽤 솔깃해하는 반응이었다.   

  

강점을 찾는다는 건 어쩌면 상당히 추상적인 이야기다. 그간 방송작가로 살아오며 절실하게 갈구했던 점이기도 했다. 프리랜서로 느꼈던 불안정함, 사회가 정해놓은 일정의 테두리 안에 속하지 못하고 있다는 압박감. 그 둘만으로도 나만의 색깔을 찾기엔 충분한 이유가 됐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가 프리랜서에만 한정되지 않을 거란 확신은 있었다. 30대 중반이 되고 나니 똑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한 친구들이 저마다의 속도로 나아가고 있다는 걸 실감한다. 어느 시점이 지나니 매너리즘에 빠지고, 나태해지고, 모든 걸 알고 있다 자부하며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일을 처리해간다. 물론 개중엔 한결같이 자신에게 엄격한 이들도 있다. 전자와 후자의 성장 속도는 해를 거듭할수록 엄청난 격차를 만들어냈다. 입사 10년 차를 기준으로 보았을 때 모두가 같은 선상에 서 있지 않다는 걸 뼈저리게 절감하는 요즘이다. 이대로 월급봉투를 꼬박꼬박 기다리며 자리만 지키는 사람이 될지, '누가 와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 될지는 각자의 선택이겠지만 난 후자의 인생을 살고 싶고 강연을 듣는 친구들이 그릴 미래 또한 그러하길 바랐던 마음이 컸다.     

  

오랜만에 하는 강연이라 힘이 바짝 들어갔다. 강의를 앞두고 며칠 전부터 금주와 운동을 병행했고 기상 시간을 조정했다. 꼬박 세 끼 챙겨 먹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별 건 없다. 자잘한 헤프닝에 일희일비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뿐이다. 컨디션을 최상으로 만들어야 강연을 듣는 친구들에게도 좋은 이야기를 건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루 전, 강연 담당자로부터 사전 질문을 받았다. 학생들이 궁금해하는 사항은 대부분 비슷했다.      

꼭 따놔야 할 자격증인 뭐가 있을까요? 

여자가 입사하기에 국내기업이 좋을까요, 외국기업이 좋을까요? 

스펙이랑 학벌 때문에 고민이 많은데, 커버할만한 대외활동이나 자격증이 있을까요? 

전공이 마이너인데, 취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딱 내가 했던 고민들이다. 그리고 십 년이 흐른 지금은 안다. 그 어떤 고민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물론 그들에겐 절실할 것이다. 아니, 상당히 현실적인 고민을 반영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다만 나는 그 답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일 뿐이다. 잠깐의 망설임 끝에 내가 내놓은 답은 이랬다.      


세상에 따야 할 자격증이라는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토익처럼 대다수 기업에서 요구하는 자격증이 아닌 이상 내가 가고 싶은 기업이 어떤 사람을 찾는지에 집중할 필요가 있어요.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내가 뭘 좋아하고 잘하냐예요. 스펙이랑 학벌,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처럼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아요. 간혹 라인을 만들거나 인맥을 쌓을 때 이용할 수 있겠지만, 저는 사무실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 하나도 몰라요. 궁금하지도 않고요. 일을 어떻게 하는지, 잘하는지가 더 중요해요. 남들은 4년 동안 자격증을 몇 개씩 따놨는데 당신은 그것도 안 하고 뭐했습니까? 라는 질문을 면접에서 받게 될 수는 있어요. 어떻게 대답할지 고민해보세요. 당당해지세요. 훅 들어오는 질문을 뛰어넘는 무기를 가지고 있으면 돼요. 좋아하는 것, 잘하는 것, 꾸준히 해온 것. 그것만큼 큰 무기는 없어요.      


스튜디오에서 강연을 도와주는 진행자 언니도 열심히 맞장구를 쳐주었지만, 학생들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했다.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살짝 당황스러웠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저 친구들이 바라는 대답이 이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보다 현실적인 조언을 원했을 거다.      


차별성을 가진 자격증은 어떨까요? 예를 들면 에어비앤비 호스트. 마케팅이나 홍보직이라면 어필할 수 있겠죠. 물건을 팔아본 경험도 좋아요. 북클럽의 모임장도 유용할 수 있답니다. 토익은 무조건 만점으로 만드시고요, 중국어는 앞으로도 열풍일 테니 HSK를 급수 하나쯤은 준비하시고요. 실용한자, 정보활용 능력 시험 정도는 다 자격증 가지고 계시죠? 정도의 멘트는 해야 했을까.      


꼰대처럼 들렸을 수도 있겠다. 당장 꽃다발이 필요하다는 사람에게 장미를 심으라며 씨앗을 쥐어주는 꼴이었을까. 직접 키워야 진짜 꽃다발을 만드는 거예요, 라며 현실과는 영 거리가 있어 보이는 말만 떠들어댄 것일까. 회사생활을 잘하는 꿀팁을 원하는 이에게 진심은 통합니다, 라는 교과서에서 나올 법한 말을 강조하는 꼴이었을까. 나의 전 시간 연사님은 면접할 때 여성 임원들의 네일 상태를 보라고 조언했단다. 깔끔하게 정돈되어있지 않으면 야근이 잦거나 여가 시간이 부족하다는 증거라며. 유독 그 이야기에 학생들의 반응이 좋았다고 말하는 담당자를 보며 나는 사실 할 말을 잃었다. 나에겐 그런 걸 발견하는 재주도, 스토리로 만들어 썰로 풀어내는 능력도 없다. 오히려 네일 상태가 좋지 않다면 야근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일이라면 도전하세요! 라고 외치는 쪽이다.       


아무렴 괜찮다. 지금은 뻘소리로 들릴 수 있을 거고 저 말들이 정답은 더더욱 아닐뿐더러 온라인 창의 허공에서 증발했을지라도 괜찮다. 학생들도 나도 현재진행형이니까. 우리는 각자 다른 위치에서 크고 작은 실패들을 경험하며 나름대로 성장해나갈 테니까. 꼰대라 한들, 누군가에게 꼰대가 된들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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