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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민 Apr 17. 2021

생각보다 안 지 오래된 사람

일주일 전쯤 지인으로부터 카톡이 왔다.


'승민아, 2주 정도 레슨 못 받을 것 같아.'


좀처럼 레슨을 빠지지 않는 사람이 무슨 일이길래. 회식이 있어도 사이다로 잔을 채워 꾸역꾸역 자리를 지키다 끝나자마자 체육관으로 달려오는 그였다. 하나를 배우면 주야장천 연습해서 마스터해버리는 그. 한 번을 연습시켜놓으면 열 번을 마쳐놓는 사람. 내가 아는 사람 가운데 가장 성실하고, 올곧은 성격의 소유자.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열흘 전쯤 운동 끝나고 집에서 컴퓨터를 하는데 갑자기 한쪽 눈이 안 보이기 시작했단다. 다음날 찾아간 동네 안과에서 몇 번의 시력 테스트를 거치는데 상황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의사가 당장 응급실로 가라 했다고. 얼떨결에 그 길로 대학병원을 찾아 코로나 검사를 마치고 정신 차려보니 3주 동안 병원 신세가 되어버렸단다.


가족의 도움으로 필요한 옷가지를 마련했다. 지하주차장에 세워놨던 자차는 지인의 도움으로 집 앞 주차장으로 돌려놓았다. 부모님을 부양하고 지냈는데 집안일 안 하니 편해 좋다며 멋쩍게 웃었지만, 며칠간 반복되어온 검사와 항생제 주사로 그는 몹시 지쳐 보였다. 늘 깔끔한 사복 차림, 자세가 예쁜 데다 잘 치기까지 해서 더할 나위 없이 멋져 보이던 유니폼 차림만 봐왔는데 환자복을 입혀놓으니 어딘가 모르게 애잔함이 밀려온다. 이럴 땐 아무 걱정할 거 없다는 듯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야 할지, 그가 겪을 감정에 공감하려 애쓰며 가만히 눈을 들여다보아야 할지 나는 모르겠어서 그저 같이 웃고만 있었다. 스테로이드 치료를 일주일째 받았더니 피부가 뽀얘진 것 같다며 마스크를 살짝 내려 얼굴을 보여줄 땐 괜스레 울컥하기도 했다.


증상도 병명도 알 수 없어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해야 한다는 그에게 병원을 같이 찾은 동생들은 딸기며 디저트며 주스며 바리바리 싸온 간식들을 건넸다. 난 뭘 가지고 가야할지 몰라 빵이며 마카롱이며 비타민을 챙겼는데, 왜그리도 가져간 종이가방을 건네기 민망했는지 모르겠다. 평일 병원 낮시간은 진료 대기 중인 환자들로 북적거렸다. 앉을 곳을 찾아 몇 번을 빙빙 돌다 대리석 기둥 앞에 짐을 잠시 내려두고 선 채로 30분을 이야기하다 나오는데, 왜그렇게 마음이 무거웠는지 모르겠다.


혈관이 터져 갑자기 시력이 저하되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대부분은 스트레스가 화근이라 했다. 그 역시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안고 사는 중이라 예상했기에 혈관의 문제냐고 물었다. 예상과 달리 그는 신경이 손상된 케이스였다. 신경은 한 번 손상되면 회복이 어려운 걸로 알고 있는데... 쉽지 않네요. 병문안 나오는 길에 같이 가던 동생이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걸 들었을 때 차라리 혈관이길 빌었어야 했는지, 답이 서지 않았다:


안과가 아닌 신경과라 하였다. 그와 같이 병실을 쓰는 환자들은 대부분이 고령층인, 신경에 증상이 있어 장기 입원 중인 분들이라 했다. 신경에 증상이 있다는 건 무슨 현상을 뜻하지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처음 일주일은 쉴 수 있어서 좋았다며 빨래도 밥도 안 하는 하루가 이렇게 편하다며 좋아했는데, 같은 병실 환자분들이 밤낮 소리를 지르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며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우리 병실에서 내가 가장 젊어, 희미하게 웃던 그의 얼굴이 지금도 아른거린다.


그와 나는 알고 지낸 지 5년 정도 되었다. 정작 가까워진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관계다. 내겐 어려운 사람이었다. 고작 한 두 살 많은 정도인데 워낙 배드민턴을 잘 치는 데다 똑부러진 논리 정연한 성격에 클럽생활도 길어 어르신들의 관심과 사랑을 듬뿍 받았던 그. 성향도 성격도 모든 게 나와는 상극이라 친해지는 날이 올 거라 생각해본 적 없는 사람. 어떨 땐 깍쟁이 같아 보였고, 어떨 땐 공감 따윈 1도 안 하는 로봇 같았다. 클럽 운영진을 맡으면서 조금씩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서 크고 작은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그에게 매우 의지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던 어느 날, 운동 끝나고 캔맥주 한 캔 마시던 자리에서 그에게 물었다. 나는 오빠가 이렇게 우리랑 어울려 노는 걸 좋아할지 몰랐다고.


'나는 마음을 여는 데 시간이 좀 걸리는 성격인 것 같아. 지금 친한 누나들은 그런 나를 10년 동안 봐온 분들이라 어느샌가부터 나도 내 사람처럼 대하게 된 것 같아.'


그제야 그가 조금 사람처럼 보였다. 이유가 있었던 거구나. 그러고 보니 그는 작은 것에 웃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나처럼 놀러 다니는 것도 좋아하고, 사람 만나는 것도 좋아하고, 실없는 농담을 던져도 해맑게 웃어주는 사람이었다. 감정 기복이 심한 나와는 달리 그는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고 합리적으로 의사를 표현할 줄 아는 어른이었다. 모두가 흥분해서 욕설을 뱉어내는 상황 속에서도 유일하게 침착함을 유지하던 그를 보았던 즈음부터 나는 그를 더욱 의지하게 되었다. 갈대처럼 이곳저곳을 이동하며 배드민턴을 치러 다니는 여타 2,30대 회원들이 썰물 빠져나가듯 클럽을 탈퇴했을 때도 그는 굳건했다. 내 클럽생활은 그가 중심축이 되어 돌아갔다. 그걸 오늘에서야 알았다.


운동하러 가면 유독 그의 빈자리를 크게 느낀다. 그 부재감이 내 일상까지 파고들기 시작했다. 맛있는 걸 먹어도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하다. 평소엔 술도 잘 안 마시는데 못 마시는 곳에 있으니 소주 생각이 그렇게 난다던 그의 말이. 후유증이 평생 갈 수도 있다던데 증상을 모르니 답답하다던 그의 걱정이. 하루 종일 심심하지 않냐는 물음에 샤워하는 시간이 네 배나 더 걸리는 데다 검사를 하도 많이 받아서 은근히 바쁘다던 그의 한숨이. 하루 24시간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다. 이따금씩 생각나면 연락을 넣곤 하는데, 어떤 말이 가장 적당할지, 어떤 텐션이 그에게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그냥 부디 그저 지나가는 바람이기를. 눈 깜짝할 사이 2주가 지나서 기적처럼 괜찮아졌다며 라켓 들고 나타나는 모습이 너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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