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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민 Apr 11. 2021

산산조각 난 접시그릇

가와구치가 화내는 걸 딱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평일 오후 네시쯤이었다. 우리 가게가 처음인듯한 손님이 들어왔다. 홀에 걸린 하회탈과 청둥오리 (왜 이걸 가져다 놨는지 모르겠지만)를 한 번 훑어보더니 코리아네, 코리아야, 라며 앉았다. 남성 두 명이었다. 말쑥한 정장 차림에선 진한 코롱 냄새가 났다. 둘이 주고받는 대화를 들어보니 한쪽이 거래처 사람인 듯한데, 알고 지낸 지 오래된 사이 같았다. 첫 주문부터 거침없이 특급 고기를 달라던 그들이 나는 왠지 달갑지 않았다.


돈을 거침없이 쓰는 부류는 두 종류였다. 잰틀하고, 성의를 보이며 본인들의 식사를 즐기러 오는 사람들. 다른 하나는 말 그대로 돈을 쓰러 오는 사람들. 후자들의 특징은 종업원들을 하대한다는 점이었다. 비위를 잘 맞춰주면 이죽거리며 야한 농담을 던져댔고, 심기를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불같이 화를 냈다. 두 남성에겐 딱히 거슬릴만한 허세를 찾아볼 순 없었지만, 적어도 대화를 나누고 싶은 사람이 아닌 건 분명했다. 


우리 가게는 단가가 높다는 특성상 종업원들이 고기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지니고 있어야 했다. 손님이 모르는 걸 알되 손님이 아는 건 그 이상으로 알아야 했다. 너네 오늘 들어온 고기 있어? 어디 거야?라는 질문에 답하려면 적어도 그날 오후에 가게로 도착한 고기를 두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어느 부위가 맛있는 고기가 도착했는지. 원산지는 어디인지. 육회는 대부분 우둔살, 홍두깨살, 꾸리살을 사용하는데 우리 가게는 사태살로 만들었다. 뒤 사태의 꽃이라 불리는 아롱 사태살이다. 소 한 마리당 1kg이 나올까 말까 한 적은 양이지만 육회로 먹기엔 최적인 부위. 맛이 쫄깃하고 육즙이 풍부해 간 마늘을 넣은 간장 양념이 살짝 비벼 날달걀 노른자를 얹어 나가면 육즙까지 후루룩 촵촵 마시는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가령 여기는 육회 무슨 고기 넣어?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소고기요,라고 대답하면 거짓말 좀 보태서 다신 안 오는 손님들이 있다는 소리다. 실제로 그런 식의 질문을 받는 건 자주 있었다.


테이블의 남성들은 업무 이야기를 마친 모양이었다. 사케 한 병을 비워갈 무렵부터 온갖 잡다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사쿠사 단골 야키니쿠집에서 먹은 특급 갈비보다 질이 떨어진다드니, 긴자에서 만났던 마마와 2차에 갔는데 꽤나 체위가 괜찮았다느니, 고기와 여자는 공통점이 다섯 가지 있다느니. 유일한 손님이었기에 내가 할 일은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있는지 간간히 찾아가 묻거나 빈 접시를 가져오는 일이었는데 좀처럼 다가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가게가 바쁘지 않을 경우 접시가 비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도 종업원들이 치워준다. 빈 접시를 오래 둘수록 접객을 못하는 가게라는 점장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테이블 위엔 샐러드를 담았던 기다란 대접, 특급 갈비 다섯 조각을 올렸던 그릇들이 히멀건 양념만 남은 채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외출 중이었던 점장은 곧 돌아올 시간이었고, 2층에서 오픈 준비를 하던 가와구치도 머지않아 1층으로 내려올 참이었다. 홀 한가운데 서서 한참을 고민했다. 가만히 있으면 가와구치가 와서 치워주지 않을까. 그전에 점장이 오면 어떡하지. 힐끔 보자마자 나를 불러 혼낼 텐데. 테이블이 저 지경이 될 때까지 뭘 했냐며 채근할 텐데 무어라고 대답해야 할까. 한참 고민하는데 테이블에 앉은 취기가 조금 덜한 남성이 나를 불렀다. 


-저기요 

-네, 빈 그릇 치워드릴게요. 뭐 필요하신 거 있으세요?

-필요한 거? 이름이 뭐예요? 학생인가?

-유리입니다. 

-유리. 유리 씨는 일본 사람인가?

-아니요, 한국사람이요. 


의미심장한 미소가 그의 얼굴을 스쳐간다. 자리를 떠나고 싶어 발길을 돌리려는 순간 남성이 팔을 쭉 뻗어 엉덩이에 손을 갖다 댔다. 온몸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손에 들고 있는 그릇을 저 사내놈의 얼굴에 던져야 하나 살짝 고민하며 서서히 뒤돌아 남성을 보았다. 


-필요한 거 물어봤잖아. 난 이게 필요한데. 


역겨운 미소를 날리는 남성을 맞은편 남성이 다그쳤다. 


-니시오 씨, 요즘 그런 짓 하면 철컹철컹해요. 큰일 난다니깐. 


큰일 난다니깐, 이라고 말하는 남성의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잠시 그를 노려보았다. 


-어, 이거 봐요. 유리 씨 화난 것 같은데. 한국 여자는 기가 세서 화가 나면 무섭다니까요. 니시오 씨가 사과하세요. 우리 여기서 고기 더 먹어야 되잖아. 


니시오,라고 불리는 남성은 걷어올렸던 소매를 성급히 내리고는 나를 올려다봤다. 


-어떻게 사과할까. 무릎 꿇을까? 아, 그건 한국 문화가 아니잖아. 어떻게 사과하면 좋을까. 그럼 사과하는 의미로 등심 2인분 더 갖다 주세요. 


때마침 가게 문이 열렸고 점장이 돌아왔다. 점장은 등심 2인분을 주문하는 남성의 목소리만 들렸던 모양인지 주방에 들어가 등심 2인분 더 시켰나 봐요, 저 테이블 잘 먹네. 라며 고기용 냉동고 문을 열고 있었다. 고마운 손님들이군, 쿠마 씨는 껄껄 웃으며 물을 약하게 틀고 칼을 갈기 시작했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점장에게 가서 방금 더 테이블에 앉은 남성이 제 신체에 손을 댔는데요, 경찰에 신고해도 되나요? 물어봐야 할지 고민했다. 입술이 바싹바싹 타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왜 행위를 가한 사람은 저 사람인데, 내 심장이 빨리 뛰는 건지 이유를 모르겠어서 답답했다. 그때 쨍, 하고 그릇이 떨어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소스라치게 놀라 뛰쳐나간 홀엔 가와구치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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