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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민 Jun 01. 2021

쉬어갈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

제주에 다녀왔다. 고작해야 일주일 남짓한 기간이었지만 뜨거운 시간이었다. 휴가 전 주부터 회사에서 갑작스러운 인사이동이 있었다. 골방에서 수년간 동고동락한 이들이 떠나갔다. 누군가 한 명은 희생해야 하는 상황이 오기도 했다. 상황에 놓인 이들 가운데 나는 연차가 가장 낮았다. 스스로 타성에 젖어있다 느꼈던 시기였기에 팀 이동을 자원했다. 잘한 일인지 실수인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나름 열심히 한다고 해온 직장생활에 회의감이 몰려오기도 했다.    

  

몇 날 며칠 쨍쨍하더니만 내가 도착한 김포공항은 우중충했다.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김포뿐만이 아니었다. 남부지방에 연일 비가 내려 비행기들이 차례로 결항되고 있었다. 아시아나 항공기마저 결항 표시로 바뀌는 걸 보며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면 일주일 동안 무얼 하고 지내야 하나 고민하기 시작했다. 수년간 사회생활로 깨달은 게 있다면 포기는 빠를수록 좋다는 것이었다. 다음 태세에 적응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라는 것. 어차피 세상만사 내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 허나 가끔은 예상치 못한 불행이 더 큰 행복을 가져다주기도 한다는 것. 그러니 작은 것들에 집착하지 말자는 것. 너무나 이른 포기에 하늘이 가엾게 여기기라도 한 걸까. 유일하게 내가 예약한 비행기만 이륙에 성공했다.      


도착한 제주공항에서 올려다본 하늘 역시 흐렸다. 수없이 제주를 찾았지만, 이렇게까지 날씨 운이 좋지 않은 건 또 처음이었다. 일기예보를 보니 일주일 내내 우산, 구름 표시뿐. 내내 비가 오다가 내가 서울로 돌아가는 토요일, 딱 토요일부터 해가 쨍하고 뜰 거라는 야속한 예보였다. 자동차도 스쿠터도 포기하고 오로지 걸을 생각으로 온 여행이었다. 뚜벅이로 제주를 다닌다는 건 언제 올지 모르는 버스를 기다릴 줄 아는 인내심과 우산 쓰고 우비를 입어도 대차게 몰아치는 비바람에 온전히 몸을 내어줄 대담함이 필요하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계획은 야무졌다. 첫째 날은 제주 남쪽 해안가의 올레길을 걷고, 둘째 날은 남서쪽의 강정마을 코스를 걷는다. 셋째 날은 북동쪽의 김녕 해수욕장을 거치는 코스, 넷째 날은 협재 해수욕장을 지나가는 코스. 다섯째 날은 숙소 주변 박물관과 4.3 유적지를 돌아보겠노라 다짐했다. 이 가운데 날씨 좋은 날이 하루라도 찾아온다면 어디에 있든 택시를 타고서라도 노을이 예쁘다는 금오름을 갈 거란 야무진 돌발 계획까지.     

 

신기한 건 계획대로 다 돌아다녔다는 점이다. 나이키 러닝 앱을 켜고 하루에 몇 킬로씩 걸었는지 확인했다. 많이 걸은 날은 24km, 적게 걸은 날은 해풍에 만신창이가 되어 중도 포기했지만 그래도 8km를 걸었다. 무슨 오기였는지 모르겠다. 킬로 수가 밥 먹여 주는 것도 아니었다. 기록을 자랑할 것도 아니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저 지칠 때까지 걸어서 안에 있는 것들을 모조리 비워내고 싶었다. 몸에서는 체지방을, 마음에서는 회사에 대한 스트레스를.      


걷기를 마치면 그날그날 숙소에서 해야 할 일들도 꼼꼼하게 계획했다. 일주일 동안 읽을 장편 소설 두 권을 가져갔고, 브런치에 날마다 하나씩 글을 올리겠노라 다짐했다. 때마침 평소 눈여겨보던 회사에 채용 공고가 떴으니 이력서도 준비할 생각이었다.      


둘째 날은 올레 7코스를 걸은 날이었다. 올레길을 걷는 날엔 숙소를 나서 동네 식당에서 아침밥을 해결하고 여정에 나섰다. 점심은 해삼 한 접시였다. 해삼을 좋아해서다. 해삼을 먹을 때면 한라산 소주를 주문했다. 일주일 동안 비가 온 건 단 하루뿐이었기에 해장은 따사로운 햇살과 시원한 바닷바람으로 원 없이 할 수 있었다.     

분 단위, 시간 단위 계획으로 얼룩졌던 일주일의 여정을 바꾼 건 둘째 날이었다. 아침부터 바빴다. 척척 맞아떨어지도록 바삐 움직여 버스를 타고, 코스 시작 지점에 도착했다. 휴대폰을 수없이 들여다보며 지도에 찍힌 GPS 표시를 보고 걸었다. 어느 순간 더워졌다. 바람막이를 벗으려고 발걸음을 멈춘 찰나 눈앞의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깨달았다. 초행길인 줄 알았던 이 동네, 오늘이 두 번째라는 걸. 심지어 불과 1년 전 제주에 왔을 때 5일 내내 묵었던 숙소가 있는 동네라는 것. 와본 적 있는 곳도 놓치는 눈썰미로 나는 무슨 여행을 하겠다는 걸까. 스스로가 한심해져 지도창을 꺼버렸다. 사실 애초부터 지도가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올레코스 곳곳엔 주황색, 파란색 리본이 달려있었다. 파란색은 정방향, 주황색은 역방향으로 걷는 사람들을 위한 이정표다. 담벼락, 돌 틈, 풀숲의 말뚝, 나뭇가지, 축사의 철근까지. 어떻게 달았을까 싶은 곳까지 어김없이 달려있는가 하면 여기엔 없겠지, 싶은 허허벌판에는 아예 페인트로 리본을 그려놓는다. 그렇게 정성스러운 표식을 두고 GPS가 웬 말이며 구글맵이 무슨 소용일까.      


발걸음은 그때부터 가벼워졌다. 제시간 안에 도착하지 않으면 코스를 완주할 수 없다는 조바심도 사라졌다. 마음에 드는 풍경이 있으면 한없이 머물렀다. 조금 어긋날 길이라도 매력적인 풍경을 뽐내는 곳이면 발걸음을 돌렸다. 찾아놓은 맛집보다 그 옆의 허름한 식당에 눈길이 가면 주저하지 않고 들어갔다.     

 

동영상을 남기고 싶어 소형 오즈모를 챙겼다. 카메라 특유의 색감이 좋아 아버지로부터 미러리스 카메라도 빌렸다. 화질 좋게 찍고 싶을 때를 대비해 휴대폰 충전도 꼬박꼬박 해두었다. 하루에 10km, 20km씩 걷는데 가방이 왜 그리도 무거웠는지 그땐 몰랐다. 모든 짐을 숙소에 놔두고 아버지 카메라만 목에 걸었다. 시간에 연연하지 않기 위해 손목시계도 탁자에 놓아두었다. 가방 속엔 텀블러와 우비만 넣었다. 다리가 아파지면 바위에 앉아 쉬었고, 종일 걸어 피곤한 날 저녁엔 캔맥주 하나 홀짝거리며 티브이를 봤다. 노트북도 이력서도 책도 방 한구석에 밀어둔 채 거실에서 황금색 골든 레트리버와 빈둥거렸다. 예전 같았으면 한 번 만날 인연이라며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을 숙박객과 말을 섞기 시작했다. 한참 어린 동생이었다. 그녀의 고민을 듣고, 수다를 떨고, 밤하늘의 별을 보러 마당에 나갔다. 그제야 여행에 온 걸 실감했다.      


마지막 날, 그간 날씨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하늘이 맑았던 날. 계획했던 마지막 올레길을 걸었다. 걸었던 코스 가운데 유일하게 중산간 지방을 지나가는 여정이었다. 밀림 같던 숲을 지나 들판을 한참 걸으니 이마에 땀이 맺힌다. 쉬어갈 겸 바위에 앉았다. 얼마나 걸어왔나 돌아보는데 숨이 턱 막힌다. 앞만 보고 걸어올 때와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왜 한 번도 돌아볼 생각을 못 했을까. 충분히 예쁜 길을 걸어왔다는 걸 왜 그땐 몰랐을까. 비로소 앞으로 나아갈 힘이 생겼다. 





'세상으로 낸 창'에 발행된 글

http://sungsan.info/column/%ec%9c%a0%ec%8a%b9%eb%af%bc-%ec%89%ac%ec%96%b4%ea%b0%88-%eb%95%8c-%eb%b9%84%eb%a1%9c%ec%86%8c-%eb%b3%b4%ec%9d%b4%eb%8a%94-%ea%b2%83%eb%93%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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