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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민 Jun 01. 2021

보려고 하면 보이는 것

5월의 시작은 아마도 보험사와의 전쟁이었다. 4월 말부터 이어오던 분쟁이 5월 초에 정점을 찍었다. 취재하고 제보자와 통화하는 업으로 살아오며 나름 세상 물정에 빠싹 하다고 생각했다. 크나큰 오산이었다. 회사라는 이름이 만들어준 거대한 울타리일 뿐이었다. 개인이 되어 조직과 싸우는 건 생각보다 단기간에 지치는 일이었다. 우호적으로 대하면 월권을 행사하고, 가만히 있으면 가마니가 된다는 말은 나완 별개의 세상에서나 있을 줄 알았던 거다.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고 그간 분노하고 짜증 내는 사람들에게 '마음의 여유를' '진심은 통하니까'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말들이 얼마나 무색하게 들렸을지 이제야 깨달아버린 거다.


나의 일, 나의 손해, 나의 권리가 되어버리니 일상이 조금씩 무너져갔다. 신기한 건 한 번 시비가 붙기 시작하니 모든 일상이 분노로 바뀌어갔다. 환불을 요구해야 하는 일이 발생하고, 책임을 물어야 하는 상황이 찾아왔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한 번 속으니 두 번은 속기 싫어서 바득바득 우기고 다닌 내 탓도 크다. 예전 같았으면 웃고 넘길 일도 어째 나를 호구로 보는 것 같아 분했다. 흥분하는 사람들에게 '왜 그리 언성을 높이냐'며 톤을 유지하려던 인내는 바닥을 보인 지 오래였다.


어느 순간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보험사 이야기를 늘어놓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억울함을 술로 풀고, 수다로 털었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사무실 책상에 앉아서도 온통 환불, 싸움, 승산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일상이 제대로 돌아갈 리 없었다. 대가 없는 봉사를 요구하는 배드민턴 클럽 총무 자리도 버겁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플레이 기술을 배우는데, 나는 고작 스텝 연습이라니. 레슨의 질에도 불만이 생겼다. 밤잠을 못 이루니 아침잠은 많아지고, 술자리가 늘어가니 체중도 늘어갔다.


아마도 시작은 사소했다. 작은 권리 하나를 포기했다. 예컨대 물건을 샀는데, 불량이어서 환불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업자와 네 탓 내 탓을 겨뤄야 하는데 그 줄다리기를 놓아버리는 식. 얼굴 붉혀가며 시간 투자해가며 분노를 표출해야 하는 에너지를 산책하는 데 써보았다.


엄청난 변화가 생겨난 건 아니었다. 동시에 아주 조금씩 실타래가 풀려나가는 게 보이기 시작했다. 친구를 만나 보험사 이야기하는 시간이 줄어들고, 기분 좋게 아침을 맞이하는 날이 늘어갔다. 어차피 세상 이치 내 것이면 내 손에 들어오고 아닌 것은 흘려보내야 맞다면 어쩌면 화가 화를 불러오는 것 또한 맞을 테니. 그냥 그렇게 믿기로 했다.


점심 먹고 양치하고 돌아오는 길에 사무실 앞에 인턴 두 명이 서성이고 있다. 약속했던 3개월이 끝나고, 다른 부서로 넘어가는 친구들이 작은 선물을 준비한 건데 한 명이 직접 적은 캘리그래피를 내민다. 인쇄한 듯한 멋진 필체라 한참을 들여다보니 검은 잉크 안에 희미한 연필 자국들이 보인다. 엇나갈까 봐 조심, 번질까 봐 조심, 뚱뚱할까 봐 얇을까 봐 조심조심 그려나갔을 아이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몇 주 전부터 마당에 수국을 심어야겠다 노래를 불렀더니 친한 동생이 오일장에 다녀왔다며 모종 사진을 보내왔다. 퇴근도 늦고 피곤해서 다음에 보자 하니 회사 언저리에서 기다리고 있겠단다. 생각지도 못한 방문에 마음이 불편해져 얼굴을 보고도 괜히 툴툴거리는데, 해맑게 비닐봉지를 내민다. 현금이 만원밖에 없어서 두 송이밖에 못 샀는데 오늘 가져가면 꽃 피는 거 볼 수 있을 거라며.


돈으로   없는 것들을 많이 받고 산다. 차고 넘치게 받고 사는데, 뭐가 그렇게 아쉬웠던 건지. 보려고 하면 끝없이 보인다. 보이는 것보다 중요한 것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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