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기억한다는 언어

by 알로

상암동에 애정하는 해산물 집이 있다. 산지 직송이라 재료가 신선하기도 하지만, 그곳을 즐겨 찾는 데엔 작은 이유가 있다. 술 마시다 화장실이라도 가려고 일어날 세면 저 멀리 눈치를 챈 직원이 화장실 문을 살짝 열어준다. 방긋 웃는다던가 친절한 목소리로 화장실은 이쪽입니다, 라는 멘트를 덧붙이진 않는다. 시선은 다른 쪽을 향해 있는데 손만 무심하게 움직이는 식이다. 그 무심결에 나오는 몸짓이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아서 반갑다. 휴지를 찾느라 두리번거리면 슬쩍 지나가면서 천장에 달린 휴지를 두어 장 뽑아 살포시 내려놓는 식이다. 별 거 아닌데, 무심한 듯 친절한 배려에 술자리엔 흥이 오른다.


오랜만에 찾았던 날이었다. 다 먹고 나와 계산대에 섰는데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포스를 찍으며 살포시 물어왔다. "오랜만에 오신 거죠?" 늘 입구 쪽에 앉는 데다 마주친 거라곤 화장실 갈 때가 전부인데 손님을 잘 기억해주는 가게구나. 기억하고 있다는 걸 표현하는 가게구나. 내심 반가웠다.


근처엔 또 다른 단골집이 있다. 테이블과 룸 두어 개, 카운터석이 전부인 작은 선술집인데 언제나 만석이다. 회전이 빠른 가게도 아니라, 한 번 둘러보고 돌아 나가려는데, 손님 한 팀이 빠졌단다. 문가에 서성이는 우리를 가게 안으로 들여놓고는 힘주어 말한다. "자리 있어요.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몇 푼 더 벌려고 손님을 모으는 그런 느낌은 아니다. 시간 내 와준 사람에게 기꺼이 자리를 마련하겠다는 마음이 전해진다. 한창 바쁜 피크타임이 끝나고 빈자리가 하나 둘 늘어갈 때. 유일하게 한숨 돌릴 수 있는 잠깐의 시간에 찾아와 얄궂은 손님일 텐데도 흔쾌히 받아주니 고맙다. 눈 깜짝할 사이에 깔끔하게 정돈된 자리에 앉으니 사장님이 알아보곤 활짝 웃는다. "오랜만이시네요." "네, 요즘 술을 안 마셨어요." "하도 안 오시길래 회사 그만두신 줄 알았어요." 동행했던 선배가 웃는다. 얼마나 자주 왔길래 저런 멘트가 나오니. 멋쩍어서 웃는다. 사장님도 따라 웃는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말 한마디로 시작부터 기분이 좋다.


자주 가는 커피숍이 있다. 주로 노트북을 들고 가 한참 작업하거나 운동 가기 전에 잠깐 들러 책 읽는 용으로 애용하는 곳이다. 주로 가는 시간대가 정해져 있다. 하루는 퇴근하고 찾았는데, 사장님이 한 마디를 더 얹는다. "오늘은 조금 늦게 오셨네요."


샐러드 하나를 시켜도 간단한 빵 하나를 주문해도 정성스럽게 내온다. "오늘은 좀 더 맛있게 구워보았어요." 라던가 "오늘은 채소가 조금 부족해서 과일을 듬뿍 넣어드렸어요." 라던가. "이 메뉴는 처음 시키신 것 같은데, 맞으시죠? 아마 좋아하실 거예요." 라던가. 나도 내가 먹었던 메뉴를 기억 못 하는데, 내가 몇 번 찾는지 잊고 사는데, 맞아주는 이들은 기억한다. 그래서일까. 해산물 집도, 술집도, 커피숍도 늘 문전성시다. 왜 여기가 잘될까. 조금만 관찰해 봐도 알 수 있다. 손님 한 명 한 명을 반긴다. "저번에 그 일은 잘 해결되셨어요?" 근황을 묻는다. "얼음을 조금 덜 넣어드릴까요?" 취향을 기억해낸다. 그러니 나는 또 누군가를 데려가고 싶어 지고, 데려간 누군가도 마음에 들어하고. 그렇게 발길은 끊이지 않는다.


일본에서 유학시절 아르바이트했던 고깃집에는 늘 오는 손님들이 오곤 했다. 점심도 저녁도 7할은 단골손님이었다. 우리 가게는 고기 1인분이 나갈 때마다 고기 위에 떡국떡 한 개를 살포시 얹어 나갔다. 2인분이면 두 개, 3인분이면 세 개. 나름 모양이 곱고 예뻐서 데코레이션 역할을 해주었지만, 몇 인분인지 한눈에 알아보기 위한 주방과 홀의 작은 약속이기도 했다. 가래떡이 익숙하지 않은 일본 손님들은 늘 되물어왔다. "이 하얀 게 뭐죠?" "한국 떡인데요, 구워서 드셔 보세요, 맛있어요." 화로 위에 얹어진 떡은 적당하게 부풀어올라 노릇노릇하게 구워졌다. 바삭바삭하고 쫄깃한 풍미라 특제 간장소스에 찍어 먹으면 별미였다. 하루는 치프가 고기 2인분에 가래떡 여섯 개를 얹어 내놓았다. 왜 여섯 개일까 고개를 갸우뚱 하니, 옆에서 껄껄 웃는다. "저분이 이 떡을 좋아하더라고." 기대하지 않았던 서비스에 손님은 기뻐했다. 기억해주어 고맙다며 건넨 칭찬은 우리가 대신 받았다. 주방을 힐끔 쳐다보니 말없이 미소 짓던 치프 얼굴이 보였다. 기억한다는 건, 누군가에게 기쁨이 될 수 있다는 걸 그날 그렇게 배웠다.


손님들은 대부분 비슷해 보이면서도 저마다 조금씩 다른 성향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쇠젓가락을 내가면 나무젓가락으로 바꿔달라는 사람, 밑반찬으로 나가는 무말랭이를 한 번은 꼭 리필해달라는 사람, 생맥주에 거품을 최대한 적게 달라는 사람, 고기를 크게 잘라주어야 좋아하는 사람, 삼겹살을 바싹 익혀주길 원하는 사람. 기억하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미리 나무젓가락을 갖다 놓고, 무말랭이를 평소보다 많은 양 내어갔고, 크리미한 거품을 살짝 얹어 나갔다. 사소한 기억들이 쌓여 소소하게 신뢰가 쌓여갔다. 단골이 된다는 건 기억해주는 것, 기억되길 원하는 것의 반복일 수도 있겠다. 기억해준다는 느낌은 편안함이 될 수도 있겠다. 자질구레한 행위를 개의치 않거나 불쾌하게 여기는 사람도 더러 있었지만, 기억을 주고받는 행위란 꽤 큰 원동력이 되어주었더랬다.


그래서 더 기쁜 걸지도 모르겠다. 기억해도 표현하지 않는 것에 점점 익숙해져 가는 요즘이라. 인간관계도 일도 점점 무미건조해져 가는 요즘이라. 내가 당신을 기억하고 있다는 걸 예쁘게 표현하려는 마음들이 유독 기쁘게 와 닿았던 걸지도 모르겠다. 사실 하나도 어렵지 않은 일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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