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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민 Sep 23. 2021

밤 10시, 홍대에서 벌어지는 일

누군가에겐 끝을 알리는 시간. 누군가에겐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하는 시간.

홍대 밤거리는 매일밤 10시, 전자와 후자의 희비가 극명하게 엇갈린다.

 

폐업과 좌절, 자살, 재난지원금, 인원 제한, 방역수칙, 민원, 벌금, 영업정지. 코로나 시대였던 1년 8개월을 지나오면서 자영업자에겐 이렇게나 많은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어쩌면 우리 모두 한 번쯤은 들어본 적 있는 이야기. 돌아보면 주변 몇 명에겐 피해 갈 수 없는 이야기. 혹은 나의 이야기. 그렇기에 자영업자를 영상으로 이야기한다는 건 쉽지 않았다. 매일 나오는 이야기였고, 모두가 알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고민 끝에 찾은 건 '밤 10시'라는 경계선이었다.


밤 10시. 나에겐 운동을 마치고 집 가는 버스정류장을 향해 홍대입구 역을 지나가는 시각. 금요일을 포함해 일주일에 세 번, 와우산로를 걸어 내려올 때마다 그간 본 적 없는 한적한 거리를 눈에 담는다. 북적북적했던 유명 커피집과 늘 손님이 꽉 차 있던 노상 분식집 테이블. 왁자지껄했던 맥주집과 긴 행렬을 만들어내던 고깃집. 하나같이 텅텅 비어있다. 손님이 떠난 자리를 행주로 닦아내거나 의자를 테이블 위에 거꾸로 올려놓고 블라인드를 치는 업주들만이 눈에 띄는 거리. 그들을 제외하곤 움직이는 생명체를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시간대다.



약 7분 남짓한 와우산로가 커브길에 달할 무렵.

골목 어귀의 여성과 마주친다. 비쩍 마른 그 여성은 늘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수북한 상자 더미와 산처럼 쌓인 쓰레기봉투 사이, 쭈그리고 앉아있거나 쭈그리고 선 채 무언가를 뒤적거리는 모습. 때론 마스크가 걸린 왼쪽 팔을 쭉 내밀고 고개를 푹 숙인 모습.



그런 그녀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풍경이 있다. 코로나로 식당 영업시간에 제한이 생기면서 나타난 풍선효과다. 양옆으로 가게들이 즐비한 길 한가운데 우뚝 솟은 건물이 기다랗게 자리 잡고 있다. 새로 지은 마포구 관광체험센터다. 계단과 조명, 넓은 공간이 삼박자를 이룬다. 그 시각 행인들을 위해 설치해놓은 조명은 술자리를 띄우는 빛이 된다. 쉬어가라는 계단은 술자리를 마련하는 자리가 된다. 야외행사를 위해 마련한 공간은 스케이트보드족이 점령하는 연습장이 된다.


가게에서 떠밀려 나왔지만 어딘가 모르게 아쉬운 사람들은 하나둘 그곳에 자리를 잡기 시작한다. 밤공기, 탁 트인 야외, 술. 이 삼박자를 술꾼들이 놓칠 리 없다. 캔맥주를 짠 하고 부딪히며 한껏 취기를 머금은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본다. 블루투스에서 새어 나오는 음악소리에 엉덩이가 들썩거린다. 전자담배는 담배가 아니라는 암묵적인 룰이 있는 모양이다. 곳곳에서 허연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상가 건물은 죄다 불이 꺼지는데, 거리의 사람들은 점점 늘어난다. 가로등을 조명삼아 보도블록 사이사이에도 술판이 벌어진다. 9시 반쯤에 열댓 명이었던 인파가 순식간에 백여 명으로 불어나는 시각, 밤 10시다.



그들의 취기가 한창 오를 때쯤 A 씨가 퇴근한다.

A 씨는 홍대에서 맥주 장사를 하는 자영업자다. 울며 겨자 먹기로 흥이 오른 테이블을 찾아 "이제 가셔야 할 시간"이라며 안내를 건네고, 주방을 마감하고, 셔터를 내린다. 집으로 가기 위해 골목을 걸어 나온다. 그렇게 A 씨가 퇴근길에 가장 먼저 눈에 담는 풍경은 노상 술파티가 되었다. 지난 7월 홍대 주점에서 외국인 강사 집단감염이 발생했다. 일시적이었지만, 홍대 상권은 초토화됐다. A 씨에겐 그날의 기억이 매출 하락과 5인이상 집합금지, 영업시간제한보다 더 잔인했던 기억이었노라 고백했다.


취재를 시작한 건 추석 연휴를 이틀 앞둔 날이었다. 마침 마포구에서 계도 차원에서 홍대 클럽거리를 순찰하고 있었다. 그날은 마지막 순찰이었던 금요일 밤이었다. 노상 술파티는 처벌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없다. 단체로 모여있거나 노마스크족이 보이면 '조심해달라'는 계도를 건네는 정도다. 경찰과 마포구 직원,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130여 명에 달하는 인원이 홍대 밤거리를 순찰한다 했다. 계도 차원에 그치더라도 이 정도 인원이면 불금도 초토화시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회사에서 나와 홍대에 도착하니 8시 반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한적했다. 추석을 앞두고 있으니 서울이 텅 비어있는 느낌마저 들었다. 너무 고요한 나머지 식은땀마저 났다. 방역수칙이 잘 지켜지는 걸지도 모르겠다. 골목골목을 돌았다. 어느덧 시계는 9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운동 끝나고 내려올 때마다 마주치던 외국인 무리들도 보이지 않았다. 술병을 든 채 거리를 활보하고 떼창을 하며 기차 행렬을 만들던 이들. 한 손에 담배를 들고 신나게 춤추던 이들. 평소엔 그리도 많이 보이더니 찾으려고 하니 없다. 그래도 내심 그 고요함이 반가웠다.


그리고 정확히 10시를 지난 시각. 거짓말처럼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10분 전의 고요함은 온데간데없었다. 온 거리가 욕설과 담배연기, 가래침, 인파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비좁은 인도 양옆에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 수다를 떨거나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말 한마디 붙이려고 몸을 기울이거나 기울이다 몸을 가누지 못해 쓰러지는 사람들이 태반인 거리. 여기저기서 몇 살이에요? 어디 가요? 헌팅 멘트가 귀에 꽂혔다. 맨 정신인 행인이라면 이곳을 지나간다는 건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취기에 비틀거리는 사람을 피하기엔 인도가 너무도 좁았고, 1초에 한 번씩 욕설이 들려왔다. 5초에 한 번씩 무단 횡단하는 이들을 향한 경적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 멀리 형광조끼를 입은 경찰 두 명이 눈에 들어왔다. 2인 1조로 순찰 중인 모양이었다. 재빨리 뒤로 따라붙었다. 이 일대에 맨 정신으로 걸어가는 사람은 저 둘과 나뿐인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처음 경찰을 발견했을 땐 안도감이 들었다. 그럼에도 도대체 왜 무수히 많은 노마스크족에게 계도 한 마디 건네지 않는 건지 의구심을 품기도 했다. 홍대 놀이터에 다다를 무렵엔 다른 의미로 안도했다. 그들을 계도하기엔 경찰이 두 명이 왜소해 보일 정도로 엄청난 인파였기 때문이다. 인파의 7할은 한국말이 능숙하지 않은 외국인이었고, 나머지 3할은 또 다른 의미로 한국말이 능숙하지 않은 내국인이었다. 열 명 가운데 한 두 명이 문제라면 계도의 대상이 되겠지만, 열 명이 죄다 문제라면 그건 또 다른 이야기가 된다.  


홍대 놀이터는 선별 진료소로 바뀌고 나서 발길이 끊겼다.

빙 둘러 울타리를 만들어둔 덕분이다. 마스크 착용이 올바른 행인 서너 명이 지나가는 정도였다. 그곳에 순찰대가 있었다. 수십 명이 노란색 조끼를 입고, 마스크 착용을 계도하는 현수막을 들고서. 취재진도 눈에 띄었다. 방송사 카메라가 있고, 눈부신 조명이 뒤따르고, 경찰 관계자와 지자체 관계자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며 계도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환한 조명이 비춰지고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행인들은 그 어느 때보다 모범시민이 되었다. 불과 한 블록 떨어진 곳과는 차원이 다른 세상이었다.


너무도 극명하게 갈리는 두 도로 사이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답이 서지 않았다. 아마 현장에 나오지 않았다면 왜 노란색 조끼가, 경찰이, 엄한 곳에서 계도를 하는 건지, 인파를 뚫고 적극적으로 계도하러 다니지 않는지 분노했을 것이다. 홍대의 그 거리를 직접 두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소극적인 행정과 무기력한 공권력에 불만을 가졌을 것이다. 방역수칙을 준수하는 무고한 시민들이 감내하는 피해만 생각했다. 법적 처벌 근거가 없다면 만들어야 한다고 여겼다. 인간띠라니. 계도라니. 제보자인 A 씨가 가장 불만을 토로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스무 번 넘게 민원을 넣었는데, '알겠다'는 대답뿐 바뀌는 게 없다는 그의 말에 나는 격하게 공감했다. 현실은 상상과 달랐다. 취재진의 카메라 조명이 움직이는 동선과 그 동선 바깥의 풍경은 너무도 극명하게 갈렸고, 그 경계선을 없앨 수 있는 건 행정력도 공권력도 아닌 개개인의 자발적인 움직임이라는 걸 절실하게 체감했다.


11시, 12시 그리고 새벽을 넘어선 시각까지.

홍대는 불야성을 이뤘다. 가게 간판도 거리의 가로등도 꺼진 지 오래였지만, 취객들은 휴대폰 조명을 치켜들었다. 경찰이 호루라기를 불고, 지자체 관계자가 "집에 가세요!"를 외치며 등을 떠밀어도 딱 그때뿐이었다. 관광체험센터는 헌팅의 메카가 된 지 오래였다. 그들이 밤 열 시에 끝나버린 술자리의 아쉬움을 토로하는 그 공간 맞은편엔 '임대'가 나붙은 공실이 즐비했다.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같은 땅, 같은 도시에 공존하는 모습이었다.


추석 연휴를 앞두고도 선뜻 고향에 내려가지 못하는 사람들. 밤 10시가 되면 이를 악물고 셔터를 내려야 하는 자영업자들. 이들의 눈에 그날의 홍대는 어떤 모습으로 비춰졌을까. '임대'가 붙은 공실들이 한껏 취기가 오른 이들에겐 그저 거리의 풍경에 지나지 않았던 걸까. 문득 곱씹게 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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