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취중진담

by 알로

술에 취한 아빠는 내 방 침대에 앉는다.

술에 취하지 않은 아빠는 문간에 선채 굿나잇 인사를 보낸다.


어제는 침대에 앉았다.

모서리에 살짝 걸터앉더니 다시 자세를 가다듬어 책장을 마주하고 앉는다. 책장에 꽂힌 책 한 권 한 권에 공들여 시선을 보냈다. 그러고는


"책장을 보면 말이야. 그 사람의 지적.. 축적..(술에 취해 단어를 열심히 고르는 듯 보였다) 가늠해볼 수 있는데, 승민이는."


하고 한참 동안 정적을 두고는


"별로야."


라며 또다시 책들을 한 권 한 권 살피고, 또 한 번 크게 훑었다.


나는 민망했다. 여기 있는 책들 대부분은 원서 빼고 다 팔 책들이야. 구구절절 변명도 늘어놓았다. 그리곤 내 시선도 책장을 향했는데, 이렇다 할 만큼 눈에 띄는 책은 사실 없었다.


"요즘 젊은 작가들이 쓰는 글을 보면 확실히 세련됐어. 스킬이 좋거든. 기성 작가들을 뛰어넘어. 그런데 깊이는 없어. 물론 나이가 조금 더 들면 달라지겠지만. 옛날 작가들 작품을 읽어보면 그 깊이가. 요즘은 그런 글을 찾아보기가 힘들어. 아빠도 글 하나를 쓰려면 몇 날 며칠이 걸리는데, 사실 그걸 글이라고 할 수도 없지만."


하고 다시 말을 줄였다. 아무리 작은 그림도 마음에 들 때까지 2-3개월씩 그려가며 만족하지 않으면 사인을 하지 않았던 화가 장욱진이 왠지 모르게 떠올랐고, 나 역시 수긍한다는 뜻으로 끄덕끄덕 하며 아빠를 쳐다보았다.


"요즘은 워낙 뭐든 빨리 돌아가는 세상이니까. 아마 시대가 작가들에게 그럴 여유를 주지 않을 거야. 기다려주지 않는 걸 거야. 그러니까 이 시대의 작가들에겐 불행인 거야. 불행일 수 있지만. 그마저도 예전 작가들은 견뎌냈다고 생각해. 어쩌면 작가에겐 숙명인 거야. 책장에 경계를 두지 마. 네 책은 아빠 책이 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아빠 책은 네 책으로 만들어도 괜찮아. 얼마든지."


그래서일까. 아침 출근길에 읽을 만한 책을 찾는데, 방에 수북하게 놓인 책들이 괜히 시시해 보였다. 그렇게 아빠의 책장에 향했고, 한참을 뒤적거리다 얇고 가벼운 책 하나를 골라왔다. 안도현의 '관계'. 이 책을 볼 때마다 나는 어제의 대화를, 아빠를 떠올리겠지.



keyword
작가의 이전글밤 10시, 홍대에서 벌어지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