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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민 Sep 23. 2021

아빠의 취중진담

술에 취한 아빠는   침대에 앉는다.

술에 취하지 않은 아빠는 문간에 선채 굿나잇 인사를 보낸다.


어제는 침대에 앉았다.

모서리에 살짝 걸터앉더니 다시 자세를 가다듬어 책장을 마주하고 앉는다. 책장에 꽂힌 책 한 권 한 권에 공들여 시선을 보냈다. 그러고는


"책장을 보면 말이야. 그 사람의 지적.. 축적..(술에 취해 단어를 열심히 고르는 듯 보였다) 가늠해볼 수 있는데, 승민이는."


하고 한참 동안 정적을 두고는


"별로야."


라며 또다시 책들을 한 권 한 권 살피고, 또 한 번 크게 훑었다.


나는 민망했다. 여기 있는 책들 대부분은 원서 빼고 다 팔 책들이야. 구구절절 변명도 늘어놓았다. 그리곤 내 시선도 책장을 향했는데, 이렇다 할 만큼 눈에 띄는 책은 사실 없었다.


"요즘 젊은 작가들이 쓰는 글을 보면 확실히 세련됐어. 스킬이 좋거든. 기성 작가들을 뛰어넘어. 그런데 깊이는 없어. 물론 나이가 조금 더 들면 달라지겠지만. 옛날 작가들 작품을 읽어보면 그 깊이가. 요즘은 그런 글을 찾아보기가 힘들어. 아빠도 글 하나를 쓰려면 몇 날 며칠이 걸리는데, 사실 그걸 글이라고 할 수도 없지만."


하고 다시 말을 줄였다. 아무리 작은 그림도 마음에 들 때까지 2-3개월씩 그려가며 만족하지 않으면 사인을 하지 않았던 화가 장욱진이 왠지 모르게 떠올랐고, 나 역시 수긍한다는 뜻으로 끄덕끄덕 하며 아빠를 쳐다보았다.


"요즘은 워낙 뭐든 빨리 돌아가는 세상이니까. 아마 시대가 작가들에게 그럴 여유를 주지 않을 거야. 기다려주지 않는 걸 거야. 그러니까 이 시대의 작가들에겐 불행인 거야. 불행일 수 있지만. 그마저도 예전 작가들은 견뎌냈다고 생각해. 어쩌면 작가에겐 숙명인 거야. 책장에 경계를 두지 마. 네 책은 아빠 책이 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아빠 책은 네 책으로 만들어도 괜찮아. 얼마든지."


그래서일까. 아침 출근길에 읽을 만한 책을 찾는데, 방에 수북하게 놓인 책들이 괜히 시시해 보였다. 그렇게 아빠의 책장에 향했고, 한참을 뒤적거리다 얇고 가벼운 책 하나를 골라왔다. 안도현의 '관계'. 이 책을 볼 때마다 나는 어제의 대화를, 아빠를 떠올리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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