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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민 Sep 17. 2021

할머니는 어쩌다 70마리 강아지와 살게 됐을까

경기도 포천 한적한 시골마을, 허름한 집 한 채.

담장 너머로 널브러진 비료포대와 쓰레기가 나뒹구는 그 집에 할머니와 개 70마리가 살고 있다. 주소를 검색하니 유기견 보호소 OOOO쉼터라는 비공식 명칭이 따라붙는다. 보호받는다고 하기엔 개들의 주거환경이 상당히 열악해 보인다.


원래 이렇게 많이 키울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여차저차 개들이 늘어나면서 더 이상 할머니 혼자 부담하기 버거워진 어느 날, 집으로 후원물품이 도착했다. 지나가다 들른 누군가 온라인 카페에 글을 올려준 덕분이었다. '혼자 사시는 할머니가 유기견 수십 마리를 돌보고 있다'며 '도움이 절실하니 후원을 부탁한다'는 내용이었다. 젊은 봉사자들이 앞다퉈 찾아왔다. 할머니는 흔쾌히 그들을 맞았다. 그러던 어느 날, 봉사자 한 명이 의구심을 품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개가 너무 많다. 대소변은 치워도 끝이 없다. 후원금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할머니의 정체는 뭘까.



세상에 드러난 할머니의 존재

동물보호단체에 신고가 들어갔다. 집과 할머니, 개 70여 마리의 삶이 공론화되기 시작했다. 몇 달 지나지 않아 할머니에게 또 다른 이름이 붙었다. '애니멀 호더'. 동물을 늘리는 데 집착하면서도 정작 기르는 데엔 소홀한 사람을 칭한다. 책임지지 못할 개를 수집가처럼 한 마리, 한 마리, 모은다는 뜻인데, 좋아하는 물건을 하나씩 모으는 호더는 죄가 없지만, 그 대상이 애니멀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할머니는 순식간에 정신 나간 사람으로 낙인찍혀버렸다.



밤낮 개 짖는 소리로 동네 사람들과 싸우기 시작했다. 출동한 경찰과 시청 공무원도 할머니를 제재할 법적 명분이 없었다. 주변분들이 불편해하신다, 민원을 전달할 뿐이었다. 이웃 간에 갈등의 골이 생기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낡은 목줄이 풀려 동네 온갖 곳을 돌아다니던 개들은 옆집 신발을 뜯고, 앞집 할머니를 물고, 뒷집 농작물을 망쳐놨다. 후원은 하루아침에 끊겼다. 몇몇 언론사가 할머니를 찾았다. 처음 한 두 번, 인터뷰에 응했다. 애니멀 호더라는 이유로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카메라와 마주했고, 생판 모르는 이들이 시도 때도 없이 집구석을 찍어가는 걸 감내했다. 마음이 너덜너덜해진 할머니는 들어오지도, 들여다보지도 못하게 담을 쌓기 시작했다. 비닐하우스 천막과 농사용 부직포로 쌓아 올린 담벼락의 높이만큼 할머니는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갔다.


애니멀 호더 현장은 발견될 수밖에 없다. 중성화를 시키지 않으니 마릿수는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나고, 밤낮 가리지 않고 짖으니 소리가 새어 나오기 마련이다. 대개는 동물보호단체로 구조요청이 들어간다. 취재를 하기 위해 다수의 단체와 봉사자들과 접촉을 시도했지만, 대부분은 취재에 거부반응을 보였다. 당장 눈앞의 강아지를 구조하는 게 우선이라서다. 구조해서 지낼 시설을 마련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래서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 사이, 낯선 카메라가 등장해 견주를 자극하기라도 하면 마음이 바뀌어버릴 수 있다. 소유권을 아직 넘기지 않은 상태이니 조심스럽다고 했다. 설사 소유권을 지자체에 넘긴 상태라 할지라도 언제 마음이 변할지 모르는 일이다. 어느 쪽이든 개들의 생사는 담보가 되어버린다는 사실이 잔혹했다.



"죄송하지만, 취재는 어려울 것 같아요."

2018년 9월 21일부터 애니멀 호딩은 동물학대 처벌 대상이 되었다. 최소한의 사육공간이 있어야 하고, 질병이나 상해를 입힐 경우 3년 이하의 징역이나 3천만 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질 수 있다는 내용이다. 모조리 처벌해버리면 되는 문제지만, 그게 쉽지 않다. 어디까지나 개인 소유이기 때문이다. 사적인 공간에 외부인이 접근하기란 쉽지 않다. 피부병이 생기고 털이 빠지고 끙끙 앓는 이 개의 상태가 견주의 학대로 인한 상흔인지 증명할 길이 없다. 학대당한 개를 구조한 것일 수도 있으니까. 소유권을 넘기자, 좀 더 좋은 환경에서 살 수 있게 하자. 동물구조단체들은 아주 조심스럽게, 오랜 시간을 들여 견주를 설득한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건 구조예요. 일단 이 아이들을 살리고 봐야 해요, 라는 말을 그래서 수없이 들었다. 이해했다. 발견자나 구조단체의 표현을 빌리자면 '소유주' 대부분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다. 마음에 병이 있고, 외부인에게 적대적이고, 감정 기복이 심해 다짜고짜 화를 낸다, 라는 말들로 묘사되었다.


70마리를 키우는 할머니와 통화를 시도했다. 어떤 목소리를 가진 사람인지 궁금했다. 전화를 받자마자 물었다. 후원 관련 글을 보았는데, 유기견들을 돌보고 계시냐. 할머니는 반가워했다. 개에 대해 물으면 신경질을 낼 거라 생각했던 내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구설수에 올라버려 동네에서 왕따가 되었다고 했다. 이제 사람이 무서워졌다, 후원도 받을 생각이 없다, 염려해주니 고맙지만 정말 궁금하면 직접 보러 오라, 는 내용이었다.

 

동물들이 처해있는 상황만큼이나 사람에 대한 궁금증도 증폭해갔다. 감당 못 할 개와 고양이를 수십 마리씩 창고에서 혹은 집에서 데리고 사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애니멀 호딩을 취재하면서 가장 고민이 됐던 부분은 과연 우리가 이 단면만 보도해도 괜찮은 걸까?라는 지점이었다. 이 털 빠진 개들 좀 보세요, 불쌍하죠, 학대행위나 다를 게 없답니다, 견주가 나쁜 사람이니까요. 영상만 봐도 명백해 보였다. 하지만, 무슨 일이든 앞뒤 맥락이라는 게 있는 법일 텐데 왜 이지경까지 왔는지,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아무것도 단정 지을 순 없었다. 견주에게 나쁜 사람 프레임을 씌워놓고 일단 개를 구조하는 데 집중하기만 하면 되는 건지. 해결책을 위해선 어떤 방향으로 끌고 나아가야 할지. 고민하던 무렵 동물보호단체 관계자가 건네 온 한마디가 귀에 박혔다.


"구조가 돼야 하는 것도 맞지만 예방이 제일 중요하죠. 이상이 감지되는 이웃이 있다면 사회적 차원에서 그런 사람에 대한 대처가 필요해요. 애니멀 호딩 위험군은 주로 경제적 취약계층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거든요."

 

애니멀 호더를 공감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지만 최대한 접점이 될만한 물꼬가 있다면 그건 경제적 취약계층이란 단어였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볼 수 있다.

어느 늦은 밤이었다. 대로변 상가건물 귀퉁이에 가지 파는 할머니가 보였다. 할머니는 작은 소쿠리에 가지를 두어 개씩 담아놓고 지나가는 행인들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과연 저 할머니가 가지를 다 팔 수 있을까.


수많은 행인이 할머니 앞을 오갔지만, 눈길을 건네는 이는 없었다. 술 먹고 귀갓길에 오른 사람들도, 퇴근길 정장 차림의 직장인도, 제 갈길 가기 바빴다. 그때였다. 저 멀리 가지 파는 할머니와 딱 비슷한 연령대인 할머니가 나타났다. 끌대를 끌고 천천히 걸음을 옮긴 할머니는 가지 몇 개를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한참을 두런두런 말을 나누었다.


서로를 알아본다는 것. 오십견을 겪어본 여성은 비슷한 증상을 가진 여성을 금세 알아본다. 회사원 무리 속 유독 허리를 구십도로 숙이는 초년생을 애틋하게 바라보는 눈이 있다. 접점은 형언할 수 없는 이끌림을 만든다. 약자를 알아보는 건 약자다. 불의의 사고로 만들어진 연대는 또 다른 연대를 만든다. 겪어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시선이란, 분명 존재한다.

 

애니멀 호딩이 경제적 취약계층에서 빈번하게 일어난다는 데이터가 다소 의아하면서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목이었다. 할머니는 딱히 개를 좋아하는 삶을 살아온 건 아니었다. 동네에서 우연히 본 버려진 개가, 끌려가는 개가, 도살당하는 개가, 동네 보신탕 집 앞에 묶인 개가, 불쌍해서 데려온 것이었다고 했다. 그렇게 한 두 마리였던 개들은 10년이 흐르고 70마리가 되어버렸다.



반려견 등록과 중성화 수술이 의무인 시대에 살고 있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인식 자체가 희미했다. 지금도 우리 동네엔 중성화라는 단어 자체가 어색한 어르신들이 많다. 한 마리 반려견을 애지중지 키우는 사람들에겐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일 수 있다. 누추하고, 냄새나고, 쓰레기가 뒹구는 오물에서 죄 없는 강아지들이 병들어가는 상황은 분명 잔인한 일이다. 하지만 견주를 욕하고 개들을 구조하는 것만으론 이 일을 해결할 수 없다. 구조활동만큼이나 인간을 구제하는 일도 중요하다.



"지금 동물 학대하시는 거 아닌가요?"

옮고 그름의 시선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보고 싶다. 애니멀 호딩이 경제적 취약계층에서 유독 자주 보이는 현상이라면 그건 앞으로 우리들이 끌어안아야 할 문제라는 걸 의미한다. 견주가 왜 그런 상황에 처해있는지, 그동안 어떻게 방치될 수 있었던 건지, 법의 사각지대가 존재한다면 어떻게 고쳐 나아가야 할지, 차근차근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현행법대로라면 애니멀 호딩은 언제고 반복될 수 있는 문제라는 걸 데이터가 말해준다.


지금 동물 학대하시는 거 아닌가요? 마음을 품으면 말하지 않아도 전달된다. 이 개들 다 어디서 데려오신 거야? 의심의 눈초리를 상대방은 어렴풋이 느낀다. 저거 저거 애니멀 호더네, 라는 적대감을 아주 잠깐 접어두고 이 사람이 어쩌다 이 지경까지 오게 됐는지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사회에서 고립된 또 한 명의 사람이 여기에 있었구나. 깨달음의 기회가, 보살핌의 기회가 아직 닿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아주 조금은 너그러운 시선이 필요할 때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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