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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민 Sep 28. 2021

눈치 보는 아이, 눈치 보는 어른

열세 살 때, 어머니 근무로 일본에서 지낸 적이 있어요. 겸사겸사 한국에서 할머니, 할아버지가 방문한 어느 날이었습니다. 여느 때처럼 거실에서 티브이 보고, 과일 먹고 노닥거리는데 할아버지가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넌지시 물어요.


"야가 와이리 눈치를 보노."


정황은 기억나지 않지만, 순간 굳어버린 어머니 얼굴만큼은 선명하게 기억합니다. 나중에 저에게 따로 물었거든요. 왜 눈치를 보느냐고. 그때 알았습니다. 눈치를 보는 건 좋은 게 아니구나. 생각해 보면 저는 눈치를 많이 보는 아이였던 것 같은데 말이죠.  


초등학교 2학년 때였어요. 하루는 지각을 했는데 도착해보니 조회시간인 거예요. 운동장에 전교생이 죄다 나와 있습니다. 교장 선생님 훈화 말씀을 듣는 시간이었죠. 늦어서 아버지가 데려다주었는데, 제가 몇 걸음 못 나아가고 쭈뼛거리다 후문 언덕바지에 숨었더니 아버지가 그런 저를 의아한 눈으로 봐요. 지금 들어가면 다 쳐다볼 텐데 저는 그게 부끄럽고 창피했던 겁니다. 한참을 쭈그리고 있으니 아버지는 점점 심기가 불편해집니다. 너는 왜 당당하게 들어가질 못하냐, 그 자리에서 큰소리로 혼나고 말았지요. 시선집중이 부담스러운 어린 마음도, 지각자라는 민망함도, 숨어있는 딸자식이 안쓰러운 아버지 마음도, 속상함을 분노로 표현해버린 당신의 방식도, 지금은 다 이해합니다. 그때는 어쩜 그렇게 하나하나 눈치가 보였는지 모르겠어요.

 

어린 시절, 우리에게 눈치란 무엇이었을까요. 저에겐 부모의 표정, 선생님의 칭찬, 반 친구들의 시선을 살피는 도구였던 것 같습니다. 일본에서 초등학교를 다닐 때도 말이 안 통하니 한동안은 눈치로 모든 걸 해결해야 했어요. 전학 간 첫날, 창가 자리에 앉았거든요. 쉬는 시간에 애들이 우르르 몰려와요. 책이며 필통이며 양갈래로 땋은 제 머리까지 만지작거립니다. 재잘재잘 깔깔거리면서 뭐라고 하는데, 알아들을 리 없잖아요. 다들 웃는 눈치라서 일단 따라 웃었죠. 복도에서 마주친 친구가 곁눈질로 힐끔힐끔 쳐다보면 저도 덩달아 긴장했고요. 눈치를 보는 상황은 늘 콩닥거림을 동반했고, 상대의 표정을 따라갔습니다. 어쩌면 할아버지가 본 당시의 저는 온몸을 눈치로 무장하고 있었을 때니 동작, 말투, 눈빛에 작은 긴장감이 덕지덕지 묻어 나온 것도 무리가 아니었겠죠.


성인이 된 지금도 우리는 눈치를 보고, 눈치를 씁니다. 붐비는 시간, 음식점에 들어가서 네 명 자리 앉을까 하다 슬쩍 2인용 테이블에 앉는다던가. 두어 번 물을 부탁했는데 까먹은 눈치면 직접 가서 가져오기도 합니다. 상대방의 감정을 추측하고, 그에 걸맞은 행동을 결정하기 위해 마음이 끊임없이 움직입니다. 이걸 '마음의 이론(Theory of mind)'이라고 불러요. 학술적 정의는 '타인의 마음을 읽고, 그 움직임을 추론하는 능력'입니다. 익숙한 이야기를 학술 용어로 적어보니 새삼스럽죠. 1970년 후반, '침팬지가 다른 존재를 이해할까? (Does the chimpanzee have a theory of mind?)'라는 질문에서 시작된 연구입니다.   


'눈치'의 뿌리를 찾기 위해서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까요?


유아 시절로 잠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엄마가 무언가를 보고 있으면 아기의 시선도 같은 곳을 향합니다. 아기는 자기가 보는 대상을 엄마한테 알려주려고 하지요(Tomasello, 1995). 이런 행동을 보일 무렵, 마음의 움직임이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아기가 엄마랑 산책하던 중 지나가는 강아지를 보고 "아...!" 하는 소리를 냅니다. 엄마도 그쪽으로 자연스럽게 시선이 향하겠죠. 강아지를 발견합니다. 아, 하는 소리를 내서 엄마에게 강아지를 알려주려는 아기의 의도. 아기의 소리에 반응해 강아지를 발견하는 엄마.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아기는 내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대상을 엄마가 보고 있다는 걸 인식하는 거예요. 엄마와 아기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강아지, 머릿속에 그려지시나요? 머릿속 그 그림에 '공동주의 집중(joint attetion)'이라는 이름을 붙여보겠습니다. 어른과 아이가 동시에 주의를 기울여 집중한다는 뜻인데요. 언뜻 입에 잘 붙지 않는 용어지만, 눈치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한 좋은 단서가 되어주는 이론이랍니다.


엄마 따라 하는 어린 여자아이

어렸을 때 엄마 화장대에 자주 기어 올라갔어요. 엄마가 아끼는 화장품도 곧잘 망가뜨렸습니다. 쉐도우 가루를 조각낸다던가 립스틱을 뭉게 뜨리는 식이었죠. 화장품을 망가뜨릴 의도는 전혀 없었답니다. 나름 화장하려고 한 건데, 힘 조절을 못했을 뿐이죠. 난처함은 엄마의 몫이었지만요. 엄마는 연한 장밋빛 립스틱이 잘 어울리는 인상이었어요. 그걸 바르면 저도 엄마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꼭 그 색깔을 골라 바르고는 엄마처럼 행동했죠.


아이가 넥타이를 매고 출근하는 아버지를 따라 하고, 뒷짐 쥐고 허리 숙인 할머니를 흉내 내는 것. 그저 표면만 따라 하는 게 아니랍니다. 출근하는 아버지한테 엄마 말투로 "다녀오세요." 한다던지, 엄마의 치마를 온몸에 두르고 저한테 하듯 "엄마 다녀올게." 한다던지요. 이 모든 건 '행위자의 세계에 직접 들어가서 행위자로서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엄마의 표면적인 행동에서 더 나아가 '어른 여성', '엄마이자 아내'로 빙의되는 거예요. 행동의 모방에서 그치지 않고, 의식세계를 발전시키는 길로 연결되는 것이지요. 그냥 따라 하고 장난치는 건 줄로만 알았던 행동들이 하나의 성장 과정이었다고 생각하니 조금 놀랍습니다. 저는 재미로 따라 했던 기억만 있거든요.


아이는 타인을 '의도성을 가진 주체'로 인지합니다. 나도 타인이랑 마찬가지, 타인도 나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 건데요. 여기에 언어가 매개체가 되면서 각각 다른 시점이 있다는 걸 깨달아요. 시점에 따라 언어가 달라진다는 걸 알게 됩니다. 예를 들면 '화병 깨졌어.' 하던 아이가 '화병이 깨졌다.', '민수가 깨뜨렸다.'라고 구별해서 쓰게 되는 식이에요. '친구가 간다'와 '친구가 온다'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점이 교차하는 걸 터득하면서 아이의 자의식도 발달하죠. 이런 학습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타인의 의도나 마음이 나와는 다를 수 있다는 걸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고 나면 상대방의 행위를 관찰하면서 상대가 뭘 하려고 하는지 파악하기 시작해요. 요구르트를 쏟았을 때 엄마한테 혼날까 봐 슬금슬금 눈치를 본다던가, 배시시 웃으면서 엄마를 올려다본다면 아이가 지금 그 과정에 있다는 뜻이겠지요. 마음의 움직임은 유아기 발달에 중요한 기초가 되어준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일본으로 놀러 온 친구들을 안내할 때마다 듣던 질문이 있습니다. 가령 신주쿠를 데려가면 "그러니까 여기가 한국으로 치면 어디야, 명동이야?" 하고요. 긴자를 데려가면 "여기가 우리나라 압구정 같은 데지?"라는 식이에요. 우리가 문화를 배울 때 상대방을 나와 똑같은 주체로 이해하는 방법은 불가결한 요소입니다(Tomasello 2006 p.6). 같은 맥락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른 문화를 접할 때 나의 문화로 이입시켜서 이해하는 거죠. 눈치도 결국은 마찬가지 방법으로 터득해나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유아기 때부터 모든 언어를 이해하진 못하지요. 반려견에게 "예삐야, 밥 먹자!"라고 말하면 그 소리에 반응한 예삐가 달려오는 딱 그 정도의 감각으로 시작되는 걸지도 몰라요. 소리가 주의를 향하게 만드는 의도로 발성된다는 걸 아이가 인식하면서 그 소리는 점차 언어로써의 역할을 하게 되는 거죠. 우리에 몸 안에, 그리고 기억 속엔 얼마나 방대한 데이터가 존재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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