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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민 Oct 17. 2021

동양과 서양, '문맥에 따른 눈치'

'테라스하우스'에서 화제였던 코스트코 사건을 소개해볼까 합니다. '테라스하우스'는 일반인 남녀가 한 지붕 아래 생활하는 모습을 담은 일본 리얼리티 프로그램인데요. 이들에겐 넓은 집과 몇 대의 차량이 제공됩니다. 아래 대화는 남성이 관심 있는 여성과 저녁 식사를 하면서 본격적으로 데이트 신청을 하려는 장면입니다.



남 : (집에 있는 차량 이야기를 하던 중에) 그 차 한 번 타보고 싶어. 같이 타자.

여 : 차?

남 : (고개를 끄덕거린다)

여 : (남성을 응시하면서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다들 코스트코 가고 싶다고 했었는데.

남 : 코스트코?

여 : 응

남 : 이 맥락에서 코스트코는 좀...(웃음) 난 지금 데이트 신청하려고 한 건데.

여 : 아, (웃음) 데이트?

남 : 갑자기 코스트코 이야기가 나와서.

여 : 아 그래? 코스트코 이야긴 줄 알았지.

남 : 내가 코스 짜 놓을게. 차로 가자. 어디든 멀리.

여 : 응. 아, 멀리?

남 : 응, 운전해서 갈 수 있는 곳으로.

여 : 코스트코는?

남 : 어디든지 좋아

여 : 코스트코 가고 싶어.

남 : 코스트코 갈래? 장 보러?

여 : 응, 미노리도 가고 싶댔어.



어딘가 모르게 대화가 조금 겉돌고 있죠? 여성은 남성이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는 걸 진작에 눈치채고 있습니다. 응할 마음이 없으니 빙빙 돌려가며 거절하는 중이죠. 눈치 없는 척, 못 알아듣는 척하며 애꿎은 코스트코 이야기만 꺼냅니다.


반면 남성은 상당히 적극적이죠. 여성이 왜 코스트코 이야기를 자꾸 꺼낼까 당황해하면서도 단도직입적으로 '데이트'라는 카드를 내놓습니다. 여성도 호감이 있었다면 "아, 데이트?"라고 되묻진 않았겠지요. 결국 대화의 끝물에 '둘이 가는 건 부담스럽다'는 마음을 간접적으로 표현합니다.


이 평범한 대화가 '코스트코 사건'이 된 데엔 이유가 있습니다. 동서양 '문맥에 따른 눈치' 간극을 잘 보여준 사례이기도 한데요. 일화가 방영되고 미국의 한 언론사가 테라스하우스 제작진에게 인터뷰 의뢰를 해왔는데, 가장 궁금해하던 질문이 "일본에선 코스트코가 인기 있는 데이트 코스인가?" 였답니다.


'미국에서 코스트코는 식자재를 구입하러 가는 곳이다. 해당 에피소드를 보니 남성이 데이트 신청을 하는데, 여성이 코스트코를 가자고 하더라. 일본 여성은 코스트코에서 데이트를 하고 싶어 하는 것이냐' 의아해했다는 거예요. 멋쩍은 듯 웃는다던가 잠깐의 정적이 흐른다던가. 어쩌면 우리는 이 모든 '느낌'이나 '분위기'로 여성이 데이트 자체를 원치 않는다는 걸 짐작할 수 있지만, 직설적인 화법이 익숙한 문화권에선 고개를 갸우뚱거릴 요소인 겁니다.


인터뷰에 응했던 패널이 설명을 해주었답니다. 해당 여성은 '나는 당신과 데이트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뜻으로 간접적인 NO를 표현한 것'이라고요. 그들에게 충분한 답이 됐을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코스트코 사건을 잘 설명해줄 수 있는 이론이 바로 '문화 식별법(Hall’s theory of cultural context)'입니다. 여러 나라 문화를 비교 분석하는 데 관심이 많았던 학자 에드워드 홀(E. T. Hall)이 생각해낸 문화 구별법입니다. '문맥에 따른 눈치'에 의존하냐 안 하냐로 문화를 분류한 건데요.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일을 1초 만에 공유하고, 아미밤 하나면 방탄소년단으로 하나 되는 세상이라지만, 그럼에도 동서양의 차이는 존재하는 모양입니다.


동서양의 커뮤니케이션은 '사람들이 상황에 얼마나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가'에 차이를 둡니다. 여기서 상황이라는 건 '문맥'을 뜻하고요. 문맥은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는 사회적 환경'을 의미합니다. '문맥에 따른 눈치'라는 건 쉽게 말해 직접 언어로 표현되는 않는 부분까지 눈치로 짐작한다는 거죠. 돌려 말한다던가, 굳이 생뚱맞은 이야기를 꺼낸다던가,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순간이 있죠. '문맥에 따른 눈치'가 요구되는 순간입니다.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알아차려주길 바라는 거죠.


에둘러 말하고, 줄여 말하고, 눈치껏 말하는 데 익숙한 한국이나 일본은 '우리가 공유하는 문맥이 거대하다(high context)'라는 입장입니다. 에드워드 홀은 '문맥'을 '벌어진 일을 휘감고 있는 정보, 벌어진 일의 의미와 밀접하게 연결되어있는 것'이라고 정의했어요. 공유하는 정보가 많은지 적은 지, 적다면 언어로 표현되는지 아닌지, 를 기준으로 문화를 분류한 거죠.


"바빠?"라는 말이 지금 잠깐 시간 되냐는 뜻이라던지, "요즘 바빠?"라는 말은 한 번 보자는 뜻일 거라고 우리는 추측할 수 있죠. 지나가다 우연히 만난 지인에게 "언제 밥 한 번 먹자!"라고 했는데, 대뜸 수첩이랑 볼펜을 꺼내 들고 "어디 보자... 나는 다음 주 수요일이랑 목요일에 시간 되는데, 지금 정하자!"라는 사람을 눈치 없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문맥'에 비중을 두는 경향이 강한 사람인 겁니다. '밥 한 번 먹자.'는 말이 인사치레라는 건 알지만, 문자대로 해석하면 틀린 행동이 아니기 때문이죠. 말 자체에 얼마나 의미를 담냐 안 담냐의 차이인 겁니다.   


'주어가 생략되어있냐 아니냐'로도 알 수 있어요. 충분히 문맥을 공유하고 있다면 굳이 주어를 붙일 필요가 없다고 보는 겁니다. 흔히 동서양의 언어를 비교할 때 주어가 생략되었다는 점이 차별점으로 거론되는데요. 생략될수록 '문맥'이 공유되고 있다는 전제가 깔립니다. 친한 사이일수록 주어가 생략되기도 하죠. 남녀의 대화에서 남성이 유독 '나는 지금 데이트 신청을, 내가 코스 짜 놓을게'라는 식으로 주어를 강조한 건 그만큼 저 둘이 공유하는 문맥이 없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에드워드 홀의 구분법을 간단하게 표로 정리해보았습니다. 일본에서는 코스트코가 데이트 코스로 인기 있나 보다,라고 받아들여진 건 그만큼 서양에선 '말 그 자체'에 의존한다는 뜻입니다. 말 뒤에 숨은 뜻이 있을 거란 추측을 하는 대신 상대방이 언어로 표현하는 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거죠. 활자만 보면 여성이 정말 코스트에 가고 싶어 한다고 생각할 수 있죠.


여성이 단도직입적으로 '나는 당신이랑 단둘이 차를 타고 멀리 나가는 게 부담스럽다'라고 표현하지 않은 데엔 관계성이 깔려있습니다. 직접적으로 부정적인 의견을 표현하는 게 실례일 수 있으니 애매모호하게 표현하는 거고요. 한 지붕 아래 살며 매일 얼굴 보는 사이인만큼 민망한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은 것이기도 하겠죠.  


사실 이건 동양문화권에 살고 있다 해서 모두가 정확하게 파악할 순 없는 부분입니다. 열심히 코스를 짜겠다며 신나 있던 저 대화 속 남성처럼 우리도 매일 숨어있는 눈치를 찾아 헤매지요.


얼마 전에 부산에 다녀왔는데요. 오랜만에 이모를 만나 점심식사를 같이 했습니다. 갑자기 연락드리고 찾아가게 된 거라 선물이고 뭐고 준비할 시간이 없어서 점심은 제가 대접해야겠다고 생각했죠. 서울에서 손님이 오면 꼭 데려간다는 고깃집을 찾았어요. 주문하고 이모가 그럽니다.


"잘 들어라. 오늘은 점심은 이모가 사는 거다. 오랜만에 만난 조카한테 밥 한 끼는 꼭 사게 해 줘야 되는 거야. 그러니까 오늘은 절대, 아무것도 토 달지 말고, 이모가 하란대로 해야 되는 거야. 알겠지?"


저에겐 두 가지의 선택지가 있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계산을 하는 것. 모양새가 있으니 계산대 앞에서 제가 냅니다, 아이다 내가 낼기다, 하지 않게 이모가 화장실 간 사이에 눈치껏 계산하는 방법이죠. 또 하나는 이모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뭘 해주고 싶을 땐 또 해줘야 마음이 편할 때가 있잖아요. 그 마음을 곧이곧대로 받는 것도 제 딴엔 이모를 배려하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주 맛있게 먹었죠. 맛있게 먹는 것도 제 역할 중 하나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이야기를 들은 엄마가 한탄을 합니다. "헉................. 네가 내야지."라고요. 또 이 말을 들으니 제가 너무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건가, 다시 고민을 하게 됩니다. 조카로서의 도리, 해주고 싶어 하는 이모의 마음, 식당에서의 이모 체면, 이모의 신신당부, 일흔을 넘긴 이모와 돈을 벌고 있는 직장인으로서의 저. 이모와 저의 관계. 밥 한 끼 먹는데도 이 모든 문맥을 살펴야 하는 겁니다. 고민 끝에 내린 저의 결론도 어쩌면 정답이 아닐 수도 있고요. 결국 이모가 좋아하는 쿠키와 파이를 보내드리는 것으로 고민에 방점을 찍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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