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OO입니다." 직장 선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름을 말하며 받았다. 선배가 다짜고짜 화를 낸다. 영문을 모르니 이렇다 할 대꾸도 못한 채 전화기를 붙들고 있는데 욕설까지 섞어가며 고성을 지르던 선배.
"야 이 새끼야, 네 이름이 쉽냐? 그렇게 말하면 누가 알아듣냐? 또박또박 발음해야 될 거 아니야?"
지인이 사회초년생 때 겪었던 일이다. 길바닥에 서서 욕설을 다 받아내던 그때 그 감정이 지금도 되살아난다 했다. 그날 이후 지인에게 습관이 하나 생겼다. 초면인 사람에게 이름을 말할 때 또박또박 천천히 발음하게 된 것.
……갓 들어온 신병에게 “어디에서 왔어?”라고 질문하는 고참에게 “서울에서 왔습니다”라고 답하면 “서울이 다 너네 집이야?”라는 말이 돌아온다. 여기에 대단한 가해는 없다. 하지만 그 뒤에 다시 “어디에서 왔어?”라는 질문이 들어오면 정말 바보 같은 대답이란 생각이 들면서도 집 주소까지 빠르게 읊어대는 자신을 확인해야 한다……
넷플릭스 드라마 <D.P>에 대한 위근우 기자 칼럼에서 가져왔다. 엄청난 악마성과 물리력 없이 한 줌의 권력과 장난기만으로도 한 성인의 주체성과 자존감을 순식간에 구겨버릴 수 있다,라고 그는 덧붙인다. <D.P>의 또 다른 장면에 "상급자가 질문을 하면 자초지종 일목요연하게 설명하라."는 대사가 나온다. 대위가 수사관에게 던진 질문에 수사관이 얼버무리며 대답한 상황. 내막을 알고 있지만, 대답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인지 다그치는 장면이다. 과연 군대문화라는 특수성이 존재해서일까? 사회에서 손윗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 우린 어떤 화법을 선택하고 있을까.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단번에 이해할 수 있도록' 대답해야 마땅하다는 인식은 어쩌면 곳곳에 스며든 지 오래 일지도 모르겠다.
당장 내일이 촬영인데 섭외가 안 된 상황. 상사가 묻는다.
상사 : 내일 촬영 섭외됐니?
A : 아까 전화를 했는데요, 계속 안 받다가 방금 받았는데, 담당자가 자리에 없다고 합니다.
B : 아니요. 아직입니다.
C : 담당자가 없어서 보류 중이라 다른 곳도 알아보고 있습니다.
A는 부연설명이 많은데 정작 질문에 대한 답이 없다. 그래서 안 됐다는 건가? 꺼림칙하다. B는 진행이 되고 있는지, 어떻게 할 예정인지에 대한 정보가 담겨있지 않다. 상사가 되물을 확률이 높다. C가 비교적 적절한 표현이다. 질문에 대한 답은 물론이요, 더 물어볼 말이 없을 정도로 깔끔하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나는 조곤조곤 말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엄마, 지영이랑 놀다가 저녁 먹고 들어올게요' 하면 될 것을 몇 번이고 되묻게 만들었다. 나갔다 올게요. 어딜? 놀러요. 누구랑? 지영이랑요. 몇 번을 되풀이하고 하루는 엄마가 말했다. "한 번에 말하는 습관을 길러봐. 자꾸 묻게 만드는 건 좋은 습관이 아니야." 그제야 알았다. 아니, 사실 잘 몰랐다. 그런데 직장 생활을 하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깨닫는다. 한 번에 말하는 것도 능력이구나.
비단 권력이 존재할 때만 해당하는 건 아니다. 친구 사이에서도 약속을 취소하는 상황에 자초지종 설명도 없이 "미안, 못가."라는 말을 들으면 묻고 싶은데 묻지 않게 된다. 설명하기 귀찮은 건지, 말 못 할 사정이 있는 건지, 그러려니 해버린다. 예전 같았으면 왜 못 오냐, 약속이 안 중요하냐, 건넸을 법한 말들도 삼키게 된다.
애초에 대화에 정답이란 게 있는 걸까. 옳고 그름의 기준이 존재하는 걸까. 예쁜 언어를 가진 사람, 엉뚱한 대답을 내놓는 사람, 필요 이상의 정보를 털어놓는 사람, 자기 이야기만 하는 사람,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사람. 대화를 어떻게 이끌어가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상은 물론 인격마저 좌우되곤 한다. 그 모든 과정에 셀 수 없이 많은 눈치들이 오고 간다. 영국의 언어철학자 폴 그라이스가 주장하는 대화의 원칙은 그런 의미에서 눈치, 감각, 센스, 관습과 같은 비언어 커뮤니케이션을 파악할 때 중요한 도구가 되어 준다.
그라이스는 기본적으로 대화에 두 가지가 공존한다는 입장이다. 발설된 말(이미 뱉은 말)과 함의된 의미(말로 표현되지 않은 부분). 발설된 말은 아래의 격률, 즉 원칙을 기준으로 이루어진다. 일종의 약속인 셈이다. 각각의 약속을 지켜진 사례들을 소개한다.
1. 질의 격률(Maxim of quality)
진실이라고 믿고 확실한 증거를 말한다
며칠 전 지인이 웃지 못할 에피소드를 겪었다며 털어놨다. 다섯 살짜리 아들이 어린이집에서 갑자기 무릎이 아프다 하였고 선생님과 친구들이 한 데 모여 아이의 다리를 주물러주었다. 결국 학부형인 지인에게 연락이 갔다. 놀란 지인은 연차를 낸 뒤 아들을 데리고 정형외과를 찾았다. 눌러보고 돌려보고 엑스레이를 찍어봐도 의사 눈엔 이상이 없었다. 원인을 모르겠다는 찝찝한 진단을 받아 들고 집으로 돌아온다. 아들에게 물었다.
"아빠가 화 안 낼 테니까 솔직하게 말해봐. 너 무릎 아픈 거 아니지?"
아들은 눈을 피하며 배시시 웃는다. 사실은 집에 가고 싶어서 거짓말을 했다며 실토한다. 깜찍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마음이 쓰이는 아이의 귀여운 거짓말. 자초지종을 듣고 나서 아이를 달랬다던 지인이 힘주어 말했다. "거짓말을 하는 게 나쁘다는 걸 확실하게 가르쳐야겠어."
2. 양의 격률(Maxim of quantity)
상대방이 필요로 하는 충분한 정보를 제공한다. 필요 이하, 이상의 정보는 안 된다
가끔 대화하다 "내가 이거 말했나?" 하고 물어볼 때가 있다. 여러 사람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얘기를 했는지 안 했는지 가물가물하다. 상대방이 이미 들었다는 듯한 추임새를 넣어주면 눈치껏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한다. 개중엔 처음 듣는 이야기인 것처럼 리액션을 다르게 해주는 친구들도 있다. 하지만 대다수는 들은 이야기를 또 듣는 걸 원하지 않는다. 반복해서 듣는다는 건 필요 이상으로 양이 넘쳐난다는 뜻이다.
어렸을 적 내가 엄마한테 사용했던 단답형 화법은 필요 이하의 정보였다. 엄마는 끊임없이 되물어야 했다. 위에서 언급한 드라마 디피에서 대위가 수사관에게 병사들 근황을 묻는 장면이 나온다. 수사관이 말을 얼버무리자 대위가 말한다. "상급자가 질문을 했으면 자초지종을 일목요연하게 정리를 해서 대답해야죠."
3. 관련성의 격률(Maxim of relevance)
지금 주고받는 것에 대한 적절한 정보를 말한다, 불필요한 정보는 전달할 필요가 없다
하루는 직장 동료가 말했다. "이 업계에서 일을 하다 보니까 성격이 조급해지는 것 같아." 무슨 뜻이냐 물으니 조금만 서론이 길어지면 답답해진다는 거다. '그래서 결론이 뭔데?'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단다. 서사가 긴데 재미까지 없으면 표정이 굳어지기도 한다. 업무 특성상 모든 게 정확하고 신속하게 돌아가야 하다 보니 '빠름'에 익숙해져서 일 수도 있다. 결론 외 이야기는 죄다 '불필요한 정보'로 치부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일상생활이라면 '동문서답'이 그 예가 되겠다. 저녁 뭐 먹으러 갈까? 물었는데 "어제 소개팅한 사람이." "코트 사고 싶다." "넷플릭스 봤어?"와 같은 뜬금없는 대답이 돌아오는 식이다.
4. 방법의 격률(Maxim of manner)
명확하지 않거나 다양한 오해의 소지가 있는 표현은 피한다
일상에서 말로 인해 벌어지는 해프닝 가운데 애매모호한 화법이 차지하는 비중은 꽤 크다. "일곱 시쯤 시간 되면 저녁 먹자."는 제안에 "이따 봐서 나갈게, 가능할 듯." 답해놓고 정작 일곱 시가 가까워져 연락해보니 "가능할 듯이라 했지 가능하다고는 안 했는데?"라는 대답을 내놓는다던가. 철수가 썸 타는 영희에게 고백했고 영희는 "기쁘다. 말해줘서 고마워!" 행복해하는 듯했는데 알고 보니 정말 '고맙기만' 한 거였다던가.
그라이스가 주장했던 대화의 원칙이 지켜진 사례들을 봐왔다. 그런데 이 원칙만 고수하고 살 순 없다. 재미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상황에 따라 군더더기 없는 문장을 구사할 필요도 있지만, 언어를 가지고 노는 것만큼 재미있는 행위도 없다. 풍자와 위트도 같은 맥락이다. 그라이스가 주장한 대로 기본적인 원칙은 준수하되 그 원칙을 벗어났을 때 비로소 함의된 의미(말로 표현되지 않는 부분)가 드러난다. 그곳에 눈치의 열쇠가 숨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