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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민 Jan 10. 2022

우리라는 말에 숨겨진 눈치

회사 생활을 하다 보면 가끔 <미생>에 나오는 장면 하나가 떠오른다자랑할만한 스펙 하나 없는 인턴사원 장그래. 입사하고부터 동기들과 끊임없이 비교 당하지만 묵묵히 견뎌내는 캐릭터다. 


하루는 옆팀 인턴이 딱풀을 빌려 쓰러와서 저지른 실수를 장그래가 뒤집어 쓴다. 결국 전무로부터 영업3 전체가 지적을 받고만다. 그날밤, 회식을 마친 영업3팀은 딱풀을 빌렸던 인턴팀 사원들과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치고...  과장이 술기운을 빌어 장그래의 오해를 풀어주며 던지는 대사가 있다.  


"너네 애가 문서에 풀 묻혀가지고 흘리는 바람에 우리 애만 혼났잖아!"  



집으로 돌아온 장그래는 자꾸만 오 과장의 말이 맴돈다. 오해를 풀어줘서였을까. 아니다. 장그래가 떠올리고 곱씹고 눈시울까지 붉혔던 말은 바로 '우리 애'였다. 미운 오리새끼 대하듯 눈길 한 번 안 주던 오 과장이 나를 '우리 애'라 불러준 것이다. 


'우리'. 듣는 순간 이전보다   가까워진 느낌을 받고, 말할 때면 내가 당신을 까운 테두리에 넣어두겠다는 마음마저 담아낸다. 깊고도 신비로운 단어다좋아하는 상대가 나를 두고 처음 '우리'라고 했던 순간 기억하는가. 드라마 <도깨비>에서   지은탁(김고은) 김신(공유) 두고 "우리 아저씨 어디 데려가시게요?" 묻는다.  '우리'  마디김신은 두근거린다. 여러  곱씹으며 입가를 실룩거린다


일면식 없는 사람에게도 '우리'는 곧잘 사용하는 말이다. 우리 지은이(아이유)라며 좋아하는 연예인에게, 우리 흥민이(손흥민)라며 존경하는 인물에게 붙여 넣는다. 나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 않았어도 애정과 호감을 표현하는 수단이 된다. 사람에게만 한정되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우리 , 우리 강아지, 우리 동네, 우리 회사, 우리 나라까지  


"한국은 쇠젓가락으로 먹어?"

"응, 우리는 옛날부터 쇠젓가락으로 먹는 문화가 있었는데, 요즘은 나무젓가락도 사용해."


"우리는 재택근무하는데, 너네는 안 해?"

"우리도 다음 주부터 시작해."


'우리'라는  음절만으로도 모든 걸 담아내기도 한다. 


앞장에서 잠깐 소개했지만, 홉스테드 문화차원 가운데 한국과 일본이 큰 격차를 보이는 카테고리는 두 가지다. 그중 하나인 '개인주의(individualism)와 집단주의(collectivism)>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한국은 18, 일본은 46. 숫자가 높을 수록 개인의 자유, 독립성, 정체성에 높은 가치를 두는 경향이 있다. 숫자가 낮다는 건 그만큼 내가 속해있는 그룹에 더 비중을 둔다는 뜻이다. 여기서 '우리'라는 단어에 초점을 맞춰 두 문화의 차이를 살펴보려 한다.   

   





일본 사람들이 자국인 일본을 말할 때도 우리나라(我が国)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신문 칼럼 마지막 줄에 흔히 등장하는 '우리는 이 사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라는 문구 역시 '우리(我々)'라는 말을 쓴다. '우리 동네(我が町)' 할 때도 마찬가지. 그런데 가만 보면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한자가 있다. '나'를 뜻하는 '아(我)'. 곧잘 '우리나라, 우리, 우리 동네'로 번역되지만, 한자를 살펴보면 어디까지나 '나' 개인이 기준이 된다. 


국어사전을 살펴보면 '아(我)'의 첫 번째 뜻은 '나', 두 번째는 '우리'라고 풀이되어 있다. 일본어는 조금 다르다. 첫 번째도 두 번째도 '나, 1인칭, 스스로'를 뜻한다. '우리(我々)'라는 단어도 반복부호(々)를 사용한다. '我'가 두 번 사용된다는 뜻이니 일본에서 '우리'란 '나와 나'라는 의미에 가깝다. 각각의 개체가 분리되어 있다. 순 한글인 '우리'는 일인칭 대명사다. '우리'에 포함된 사람이 한 명이든 백 명이든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일인칭으로 간주한다. 일본의 '우리(我々)'와 한국의 '우리'는 언뜻 비슷하게 들리지만, 글자를 쪼갤수록 개인의 초점을 어디에 맞추고 있는지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일본 지인들이 매번 궁금해하던 것 중 하나. "도대체 왜 남자 친구도 오빠고, 아는 오빠도 오빠고, 친오빠도 오빠야?" 특히 '아는 오빠'를 설명할 때는 꽤나 애를 먹었다. 왜 대학 선배를 언니라고 부르냐는 질문도 자주 받았다. 우리에겐 익숙한 호칭문화다. 조금 친해지면 나이를 공개하고 누가 언니인지, 누가 빠른 년생인지, 언제부터 말을 놓으면 되는지, 정리한다. 통성명했다는 건 그저 이름만 주고 받고 끝나는 게 아닌 이러한 나이 정리까지 일단락 지어진 상태를 뜻하기도 한다. 그렇게 언니오빠동생 사이로 묶이는 문화. 한국어를 한창 배우는 외국인 친구들은 의아해한다. 뭐야, 이 나라는 전국민이 가족이야...? 



한국이 '우리'와 '남'을 경계 짓는다면 일본은 '안(우치)'과 '바깥(소또)'을 나눈다. 


한가운데 있는 동그라미가 '나, 개인'을 뜻한다. 나를 둘러싼 첫 번째 동그라미가 A집단인데 가족이나 친구, 친한 관계인 사람들이 여기에 속한다. 남자 사이에서 어릴 때부터 같이 놀며 가까이 지내온 벗을 한국에선 '불알친구' 또는 '부랄친구'라고 표현한다. 일본어로는 오사나나지미(幼馴染み)라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길들여지고(), 물든 사이()라는 뜻이다. 둘 다 가장 친한 친구사이를 나타내는 말이지만, 발가벗은 몸으로 부대끼며 자라온 사이와 두 개체가 오랜 시간 서로를 물들이듯 함께 자라온 사이는 어감이 주는 친밀도가 다르게 느껴진다.


'나'를 두 번째로 둘러싼 동그라미는 직장, 동호회, 모교 동창들과 같은 존재다. 딱 여기까지가 일본이 말하는 '안'에 해당하는 사람들이에요(때문에 B까지 점선으로 표현되었다). 동그라미 선이 뚜렷하게 그려졌다는 건 그 안에 속한 사람들에게도 뚜렷한 기준점이 부여된다는 걸 뜻한다. A그룹에게 사용하는 언어와 C그룹에 속한 이들에게 쓰는 말은 다를 수 있다는 거다. A한테 들으면 기분 나쁘지 않은 말도 C가 하면 '뭣이라?' 반응한다. 남이 아닌 사람에게도 "남이사?" 라는 말로 대꾸하는 우리와는 다르다. 바깥 사람들은 철저하게 그에 걸맞은 방법으로 대우한다. 일본 사람들은 겉과 속이 다르다, 는 말엔 이러한 경계선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뜻일 수 있다.


우리는 저 동그라미가 나타내는 경계선을 일본처럼 두껍고 뚜렷하게 놓고 살지 않는다. 계기만 있다면 C그룹에서 '우리'그룹으로도 순식간에 이동시켜버린다. 술잔이 몇 순배 돌면 친구 사이가 되고, 같은 동네 한 다리 건너 아는 사이면 친밀감이 올라간다. 경계가 부드러운 만큼 '우리'와 '남'의 관계도 유동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 방법도 때론 과격하다. 피해를 주기도 하고, 민폐를 끼치기도 하고, 정을 쏟아붓기도 하면서 선이 지워지고 칠해지기를 반복하는 식이다.


그렇다면 C는 무엇이냐. 아예 동그라미 안에 포함되어있지도 않다. 외부인, 낯선 사람을 뜻한다. 나와는 접점이 없는 타인이다. 거친 말을 하기도 하고, 예의를 차리지 않는 대상이 되기도 한다. 방금 전까지 친절했던 가게 직원이 퇴근하고 행인이 되는 순간 더이상 그 친절은 찾아보기 어렵다는 뜻도 된다. 가게 안과 밖에서 나에게 요구되는 룰이 다른 까닭이다.


바꿔 말하면 C에 속한 타인이 내가 일하는 가게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철저하게 이 사람을 손님으로 대접한다는 뜻이다. 일본식 가게의 친절함이 한결같이 유지될 수 있는 건 손님이라는 존재가 C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가게는 <직원이 손님을 대하는 방법>이라는 메뉴얼에 따라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모든 행위가 이루어져야 하는 장소다. 그렇기에 동그라미는 친분의 단계를 나타내는 게 아닌 그 안에 속한 사람들을 대할 때 지켜야 하는 행동반경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식당에 가서 '이모, 된장찌개 하나 주세요.' 하면 일본 친구는 왜 저 사람이 네 이모냐고 묻는다. 이모는 일본어로 감자(芋)라는 뜻이라 한 번 놀라고, 엄마의 언니나 여동생을 뜻하는 단어라 말해주면 두 번 놀란다. 처음 가본 식당이라 할지라도 우리에겐 이모라는 호칭이 친숙하다. 그뿐인가 길을 묻기 위해 말을 건넨 상대가 선생님이 되기도, 사장님이 되기도 한다. 외국인에겐 신기할 따름인 호칭 투성이다.


일본에서 일하던 고깃집에서는 주문을 받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건 테이블 앞에 한쪽 무릎을 꿇는 일이었다. 직원이 손님을 내려다보면 손님이 거북해한다는 이유였다. 손님이 큰 소리로 주문하지 않아도 될 만큼 적당히 가까운 거리를 유지한 뒤 고개를 들고 손님을 올려다봐야 한다. 가게에서 직원이 해야 하는 역할이니 그 의도를 알면 큰 거부감이 없었다. 종종 찾아오는 한국인 단골손님들은 다르게 느꼈던 모양이다. "어머 일어나, 일어나. 뭘 잘못했다고 무릎을 꿇어."


우리가 "이모, 된장찌개 하나 주세요." 했는데 이모가 무릎 꿇고 "예, 주문 확인하겠습니다. 된장찌개 하나 제육볶음 하나 맞으시죠?" 하는 모습,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백화점 명품관에서 이루어지는 서비스와는 다른 이야기. 백화점 가서 직원에게 이모, 백 좀 보여주세요, 하는 경우는 없으니 말이다. '우리'라는 범주에 들어가는 호칭을 부를 때 비로소 걸맞은 친근한 행위도 따라오는 식이다.


'남'이었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우리'가 되는 한국 사회에서는 그만큼 눈치의 기준이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눈치를 줄 때도, 볼 때도, 챙겨야 할 때도 초점은 개인에게 맞춰진다. 관계의 경계선이 뚜렷하다면 '이 사람들한테는 딱 여기까지만 허용해야지.'라는 사회적 룰이 존재한다는 걸 텐데 말이다. 이 식당에 가서 이모라 부르고 저 식당에 가서는 저기요,라고 한다면 대상이 누군지에 따라 나의 행동도 바뀐다는 뜻이다. 어디까지나 '나와 상대의 관계'에서 나오는 호칭이다.


보다 인간관계의 경계선이 뚜렷한 일본 사회에선 그 어느 식당에 들어가도 직원을 '이모'라고 부를 수 있는 곳이 없다. 경계선을 넘나들 확률이 그만큼 낮은 것. 자연스럽게 일본에서의 눈치는 '대상'이 아닌 '내가 있는 장소'라는 테두리에 초점이 맞춰진다는 뜻이다.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말이 맞다는 걸 실감하면서도 그만큼 다양하고, 다르고, 다채로운 각자의 문화를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는 걸 체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쓰면서 '우리'라는 말이 참 예쁘다는 걸 새삼 느낀다. '우리'라는 단어에 우리가 담고 있는 세상은 얼마나 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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