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아무랑도 연이 닿지 않는 날이 있다. 가령 한 지붕에 살고 있는 가족이 별다른 연락 없이 여행을 연장한다던가, 퇴근하는 길 삼겹살이 너무 먹고 싶었는데 갑작스러운 번개에 응해줄 이가 없다던가. 오늘은 날이 아닌가 보다 싶은 날. 그런 날엔 교보문고에 들러 책을 사고 다음날 볼 영화를 예매한다. 딱히 의도를 가진 적은 없고 지나고 보면 항상 그래왔다.
그리고 잠자리에 들기 전, 오늘은 무엇이 나를 공허하게 만들었던 것인가 하루를 복기한다. 며칠 전 신카이 감독의 사전 녹화가 있었고 오늘은 오전부터 방송시간에 맞춰 편집을 해야 했다. 나의 역할은 사전에 번역해 둔 말자막이 외국어 싱크에 맞게 잘 등장하는지, 잘 넘어가는지, 오역은 없는지 검수하는 일이었다. 방송은 무탈하게 나갔고, 그래서 아마도 긴장이 풀린 게 아닐까 싶다. 이런 날은 맛있는 맥주 한 잔 정도는 해줘야 하는데. 끝끝내 아쉬워하다 교보문고에 발을 들인 순간, 온라인 장바구니에 넣어두었던 책 두 권을 결제하는 순간, 삼겹살 2인분 어치 가격으로 훨씬 좋은 걸 손에 넣었다고 절감한 순간, 아무도 응해주지 않았음에 고마움을 느꼈다.
나의 책은 순위권 100위 바깥으로 밀려난 지 오래였기에 별다른 기대가 없었는데 어떤 연유인지 스테디셀러 매대에 놓여있었다. 그렇다. 사실 베스트보단 스테디가 훨씬 반가운 것이다. 오늘의 운은 이곳에 다 쓴 것이라 자위하며 집으로 돌아와 카레를 만들어 먹었다. 물론 맛있는 캔맥주와 함께.
이런 날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