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요즘 얀데루다. 얀데루라는 말을 정확하게 번역할 수 있는 언어가 내겐 없다. 얀데루는 일본어다. 사전을 찾아보면 얀데루란, '앓다, 병들다, 걱정하다, 괴로워하다, 병에 걸리다' 따위의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다. 하지만 얀데루는 무언가를 앓고, 병들고, 걱정하고, 괴로워하고, 병에 걸린다는 말론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을 뜻한다. 웃기는 일이다. 사전적 정의가 전부인 단어를 사전적 정의로는 표현할 수 없다는 게.
얀데루는 어떠한 병명으로 대변될 수 있는 증상이 아니다. 다소 저하된 텐션, 그 어떤 공허함, 황망함, 허망함 같은 것들에 가깝지만, 결과적으로 얀데루를 표현할 수 있는 건 '모호함'이다. 정확한 언어로 표현할 길이 없어서다. 그건 얀데루의 뿌리인 일본어를 살펴봐도 마찬가지다. 얀데루의 정확한 표기는 病んでる(얀데루)인데, 직접적 정의인 '병을 앓고 있다'는 의미와는 엄연히 다른 뉘앙스를 풍긴다. 얀데루의 예시로 등장하는 문장은 이러하다. '나 따위는 (할 수 있는 게 없어)' '누구한테도 이해받지 못하는 (감정)' '완전, 절대 (적인 무언가)' '절망적이다, 끝이다' '즐겁지 않다'.
가령 요즘 나는 얀데루야, 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누군가 '왜 우울해?'라고 물었을 때 딱히 우울해할 만한 정확한 명분이 없다는 뜻이다. 명확한 계기나 원인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그렇게 되는 것이고, 그냥 그럴 수도 있는 것이다. 바쁜 일과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동네 편의점에 들러 캔맥주 하나를 사들고 벤치에 앉아 고개를 들었는데 우연히 눈앞에 보름달이 있고, 그 달을 좀 예쁘게 찍어보려 하는데 나의 휴대폰은 빛 번짐이 심해 정체를 알 수 없는 사진이 찍히는 것. 평소라면 '아 씨 아이폰 개구리네, 이참에 갤럭시로 바꿔?' 하고 말아 버릴 일을 두고 하염없는 무력감을 느끼게 되는 감정이다. '왜 내 핸드폰은 달 사진 하나를 제대로 못 찍는 것인가' 하고. 그러니까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게 넘길만한 일을 이유 모를 한숨으로 끝끝내 붙잡게 되는 감정 같은 것이다.
얀데루는 가령 이런 것이다. 내 돈 내고 등록한 소설반 수업을 들으러 갔는데, 그날 과제로 나온 소설을 읽고 후기를 나누는 자리에서 (나는 꽤 재미있게 읽었던) 하염없이 감정을 이입시켰던 소설 속 주인공을 향해 소설반 모두가 질타와 비난을 쏟아붓는 걸 보고 있을 때 드는 감정. 그런 참담함 같은 것. 누구도 자초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고독감이 되어버리는 것. 모두가 공격하는 소설 속 주인공에 이입하는 나라니. 선생님조차 '저는 이런 소설이 당선된다는 게 이해가 안 가요'라고 말하는 작품 속 주인공에 빠져드는 나는 대체 뭐가 문제인가. 학생 열네 명 가운데 소설 속 주인공을 이해하는 사람은 왜 아무도 없는 것인가.
모든 일에 개연성을 찾는 사람은 끝끝내 얀데루의 의미를 알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요즘 얀데루야, 라고 말했을 때 '왜 우울해 ㅠㅠ 자기는 뛰어난 사람이야!'라며 해맑은 위로를 건네오는 애인에게 느끼는 공허함 같은 것이다. 애인은 죄가 없지만, 나 역시 죄가 없다. 우리 사이엔 끝없는 공백이 존재한다. 그런 설명되지 않는 감정이다. 집에 돌아가면 따뜻한 얼굴로 맞이해 줄 가족이 있고, 자유롭게 가고 싶은 곳을 향해 걸어갈 두 다리가 있고, 말할 수 있는 입이 있고, 쓸 수 있는 손가락이 있음에도 그저 무력하고 불행하다고 느끼는 감정 같은 것. 개연성 따위 없는데, 자꾸만 개연성을 찾으려는 사람들 사이에서 점점 무력해지는 마음 같은 것. 딱 그런 것이다. 세상엔 엄연히 '그냥'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만, 부정적인 상황에서의 '그냥'은 독이 된다. 그냥 보고 싶었어,라는 말은 세상 로맨틱한 고백이 되지만, 그냥 우울해,라는 말은 정병의 시초쯤으로 여긴다.
그래서 나는 얀데루라는 단어를 가진 문화가 가끔은 조금 부럽다. 얀데루, 라고 말하면 얀데루, 라는 언어를 가진 사람들은 일단 웃고 본다. 희미하게 웃으면서도 절대 '왜?'라고 묻지 않는다. '어떤 일 때문에 그런 거야, 말해봐' 다그치지 않는다. '넌 행복한 사람이야. 힘을 내'라는 섣부른 위로를 건네지 않는다. 대체로 돌아오는 말은 이런 식이다. '지금 어디야?' '한 잔 할래?'
그러니까 얀데루의 해답은 '곁을 내어주는 것'이다. 해결책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공감을 바라는 것도 아닌, 엠비티아이 따위로는 찾아낼 수 없는 영역이다. 그냥 감기 같은 것이다. 감기 걸렸다고 말했을 때 '혹시 어제 잘 때 방 안의 온도가 10도 이하로 떨어져 있던 것은 아니니?' 따위의 개연성을 갈구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 것. 애초에 개연성이 뭐 그리 중요하던가. 잠자가 자고 일어났더니 벌레로 변한 걸 개연성 따위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던가. 그냥 그렇게도 될 수 있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