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가 별 거야?

2020년 1월 1일

by 알로

최근 반년 유독 날 괴롭히는 생각 중 하나다. '나 꼰댄가?'
SNS에 떠돌던 문구가 며칠 동안 잊혀지지 않는다. 부탁하기 전에 조언을 건네는 사람은 꼰대란다. 그후로 동생들에게 카톡을 건네는 일에 머뭇거리게 됐다. 나 지금 꼰대같은 말투 쓰나 혹시. 이 문장, 오지랖인가.

솔직히 내 나이는 소위 말하는 '꼰대'와는 거리가 멀다. 적어도 난 그렇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불과 몇 주 전 그일이 나를 '꼰대'라는 화두의 장으로 끄집어 냈다.


보통 방송이 끝난 다음날은 비교적 여유롭다. 당장 아이템을 찾아야한다는 압박감이 덜하다보니 평소보다 일정에 시달리지 않는 편이다. 천천히 신문을 읽는다던가, 내키면 책도 꺼내 본다. 사무실에 앉아 당당히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건 우리 사무실만의 메리트일 수도 있겠다. 독립된 공간이라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상사가 떡하니 앉아있는 사무실 한가운데서 당당하게 책을 꺼내든다는 건 좀처럼 상상하기 어렵다.

며칠 뒤 출근하니 건너편에 앉은 팀원이 책을 읽고 있었다. 아예 독서대를 펼쳐놨다. 노트북이고 이어폰이고 방송 준비에 필요한 모든 물건을 깡그리 치운 채 오로지 독서대 하나만 달랑. 그 깔끔한 환경 속에서 그는 이청준의 <눈길> 을 읽고 있다. 아이템에 급급해하며 "뭐할까요, 뭐가 좋을까요?" 눈빛으로 다그치던 평소 그와는 달리 여유롭게 책장을 넘기고 있는 모습이란, 나쁘지 않았다. 그거 재밌어요? 이청준 책이네. 오, 벌써 다 읽었어요? 읽는 척만 하는 것 아닙니까? 시덥지 않는 농을 건넸고 결국은 나도 며칠 뒤 눈길을 읽고 있었다. 좋은 시너지라고 생각했다.

하루는 사무실에 들어가는데 입구 쪽에 앉은 인턴 친구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날은 그녀가 책을 읽고 있었다. 아예 컴퓨터도 꺼놨다. 왼쪽 다리를 꼬아 책을 대충 걸터 놓고 한 장씩 읽어내려가는 뒷모습이 예뻐 한참을 지켜보다 들어갔다. 좀 신선하면서도 당돌하고 귀여워보였다. 이렇게 하나씩 책 읽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좋겠다, 생각하며 그녀에게 슬쩍 말을 건넸다. 무슨 책 읽어요? 요즘 우리 사무실 분위기, 독서 삼매경! 너무 좋네요.

내가 예상했던 반응과는 다르게 화들짝 놀라 책을 덮어버리던 그 친구.

"아, 선배들께서 시키신 일이 없어서 잠깐 읽고 있었던 겁니다!"


당황했다.


"아니, 정말 보기 좋아서 한 말인데. 읽어요. 저도 읽을 건데, 진짜예요!"


거듭 손사래 쳤지만 인턴은 아닙니다! 를 삼창한 뒤 결국 책을 가방에 집어넣어버렸다.

머쓱해진 나는 자리로 돌아왔다. 한없이 미안했다. 그리고 의아했다. 좋은 의도로 건넨 말인데 불편했나. 건네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좋은 의도도 왜곡되어 들릴 수 있구나. 아무래도 그 친구보다는 이 회사에 오래 있었고 나이도 많으니 충분히 그 범주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거겠다.


며칠 동안 이 이야기가 나의 화두였다. 사람들은 웃기다며 박장대소했지만 그들 역시 나보다 나이가 많거나 연차가 높았다. 그 친구의 속마음을 대변해줄 이는 없었다. 그 후로 취재와 관련된 내용을 제외하곤 인턴 친구들에게 말을 걸지 못한다. 옷을 예쁘게 입고 왔다면 "오, 오늘 어디 가요?" 헤어스타일이 바뀌었으면 "앞머리 잘랐네. 이뻐요" 라고 말할 법도 한데, 혹시 상대방이 불편해질까봐 괜스레 눈치가 보이는 거다.

꼰대는 예전부터 있었다. 우리 모두 속으로만 생각했을 뿐이다. 불편한 대화를 적절하게 회피할 수 있는 프레임이 나온 것뿐이다. 불쾌하고 재미없음을 당당하게 오픈할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뿐. 그렇게 바뀌어가는 분위기에 대찬성이라며 두 팔 벌려 환영하고 있었는데, 정작 내가 그 대상이 되어가고 있단 사실은 망각하고 있던 거다.

뼈아픈 문구였다. 묻기 전에 주는 조언은 꼰대의 잔소리라는 것. 비록 그것이 좋은 말일지라도 말이다. 난 그동안 유독 가까운 사람들에게 좋은 의도랍시고 이야기를 길게 터는 습관이 있었다. 다행히 그 친구들은 내게 좋은 말을 해주니 고맙다고 말해줬지만 사실 그것도 모를 일이다.

친한 동생과 오전에 카톡을 주고받다 자연스레 덕담을 주고받는 분위기가 됐다. 좋은 사람 만나 연애도 했으면 좋겠고 올해는 네 적성에 맞는 일 찾아서 열심히... 까지 쓰다 지웠다. 괜한 잔소리가 될 것 같았다. 나 아니라도 그 친구에게 연애하란 소리는 많이들 할 것 같기도 했다.

굵고 짧게 자주 보자.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 나머진 다 알아서 잘하니.

그 친구는 좋다며 화답한다. 올해는 작년보다 더 많이 삼켜야겠다. 귀를 열어야겠다. 이왕 나이 들고 되는 꼰대, 조금이라도 아름답게 돼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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