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시간짜리 데이트

2020년 1월 23일

by 알로

오랜만에 익선동을 걸었다. 밥집 찾아다니려고 잠깐 돌아다닌 게 전부지만 시간이 좀 더 있었더라면 들어가보고 싶은 곳이 많았다. 폭신폭신 귀여운 귀마개가 잔뜩 걸린 가게에서 구경도 하고 싶고 그러다 마음에 드는 털장갑이라도 발견하면 하나쯤 장만한다던가. 나는 빨강색 살 건데, 너는 흰색이 잘어울려. 내가 사줄거야 니가 사줄래 옥신각신 실랑이도 한다던가. 노란 조명아래 테이블에 마주 앉아 달달한 케이크 한조각 시켜놓고 창밖구경을 한다던가. 예쁜 정원마냥 잘 꾸며놓은 카페에서 이어폰 한쪽씩 꼽고 머물며 노래도 몇 곡 듣는다던가. 혼자다닐 땐 눈에 들어오지 않던 인생 네컷. 커튼 확 열고 들어가 좁네 얼굴이 크네 어쩌네 투닥거리며 사진 한 장 찍고 싶다던가.

겨울이 나에겐 그런 것 같다. 코트를 여며도 바람은 들어오고 제아무리 주머니 속에 두 손을 구겨넣어도 여전히 시렵다. 그러니 따뜻한 열기가 올라오는 버스 좌석이나 사람들의 온기가 느껴지는 지하철 안이나. 잠깐이지만 꼭 잡고 있는 그 아이의 손처럼. 아주 살짝 온기를 느끼면 그게 두배 세배 따뜻하게 느껴지는 거다. 평소엔 무심코 스쳐온 풍경들이 새삼 따뜻하게 다가와서 이것도 해보고 싶고 저것도 먹고 싶고 그런 마음들이 불쑥불쑥 올라오는 그런 계절인 거다.

체력 하나는 그 누구한테도 뒤지지 않을 만큼 하루에 약속 서너탕은 거뜬했는데. 여전히 쉽게 피곤함을 느끼진 않지만 몸이란 건 쓴 만큼 쉬어줘야되고 에너지는 쏟은 만큼 충전해줘야 제기능을 할 수 있다는 걸 깨닫는 나이가 됐다. 그러다보니 하루하루가 흘러가는 것도 예전과는 다르게 빠르고 아쉽다.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살아놓고 달라질 내일을 기대하는 건 정신병과 마찬가지라던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그래도 하나쯤은 어제보다 나은 하루를 만들려고 매순간 정신을 붙들고 있다.


오늘 나간 밀착은 최근에 했던 아이템 중 가장 희열을 느꼈던 방송이었다. 매번 내 방송을 빠짐없이 모니터해주는 엄마한테 한줄평을 부탁했다. 우리의 대화를 듣던 아빠가 이젠 누구의 평가에도 의지하지말고 네가 한줄평을 남겨보렴, 한다. 맞다. 이제는 누군가의 평가에 얽매이지말고 내가 만들어갈 때가 온 것 같다. 이쯤되면 나이를 먹는다는 게 그렇게 슬프지만도 않고 아쉽지만도 않다. 그냥 조금씩 그릇을 키워가면서 전에는 미운 사람 한 사람 보듬었으면 내일은 한 사람 더 보듬을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나이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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